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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명불허전

어둠의 속도 (엘리자베스 문 지음/정소연 옮김, 북스피어)
장르 소설 특히 SF에서 걸작으로 취급받는 소설의 상당수는 다른 명작들이 그러하듯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주제로 삼은 것들이다. 이 소설도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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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문 지음 | 북스피어 펴냄
2004년 네뷸러 상 최우수 장편상 수상작 자폐인의 시선을 통해 바라보는 세상을 섬세하고 차분하게 그려낸 장편소설. 2004년 네뷸러 상 최우수 장편상 수상작으로, 작가는 시종일관 냉정할 정도로 차분하게 서술하며, 쉽게 알아차리기 힘든 아주 세밀한 인물의 내면까지 구석구석 탐구하고 있다. 소설의 배경은 태아나 영아기 때 모든 신체적 장애를 치료하는 것이 가능해진 근미래. 하지만 이미 성인이 된 사람들은 장애인으

소설은 자폐인의 내면과 간간히 자폐인을 바라보는 전형적인 주변의 시각을 보여준다. 저자가 자폐인을 20년간 키우면서 얻은 경험을 토대로 해서인지 자폐인의 사고 방식에 대한 묘사가 뛰어나다.

소설의 제목은 어둠을 빛의 대쌍으로 생각한다면, 어둠이 언제나 빛보다 빠르기 때문에 빛 보다 앞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어둠의 속도는 얼마일까라는 주인공 루의 질문에서 가져온다.

루는 자폐인이지만, 따라서 일반인과는 다른 인지 패턴을 갖고 있지만, 미래 의학 기술의 발달로 조기 치료를 받아 일반인의 언어 능력과 행동을 모사할 수 있다. 그 덕에 여러 가지 제약이 있지만 독립 생활을 하고 직장도 갖고 있으며, 펜싱을 취미로 배우기도 한다. 루는 여러 사건과 경험, 특히 펜싱 레슨을 통해 겪게 되는 사람들과의 부대낌을 통해 자신의 삶과 타인의 삶을 더욱 잘 살펴보게 된다.

어느날 자폐증을 치료할 수 있는 기술이 자신이 다니는 개발되었고 이를 자폐증이 있는 자신과 직장 동료들에게 시험하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는 신약 개발에 대한 윤리 규정을 어긴 것이어서 직장 상사가 행정 처분을 받게 되지만, 루는 그것보다 자신이 치료를 받아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자폐증이 없는 자신이 나 자신인가의 물음에 직면하게 된다.


2. 그럭저럭

다윈의 라디오
(그레그 베어 지음/최필원 옮김, 시공사)
인류는 어떻게 진화했을까? 그리고 새로운 인류는 과연 등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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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그 베어 지음 | 시공사 펴냄
진화의 다음 단계에서 인간은 끝장이다! '하드 과학소설의 대가'라 불리는 그레그 베어의 소설. 1984년 이래 두 번의 휴고 상과 다섯 번의 네뷸러 상을 수상한 작가는 우주탐험에서 분자생물학에 이르기까지, 과학의 최신이론을 가져와 흥미진진한 과학소설을 발표하고 있다. 2000년 네뷸러 상과 2000년 인디버 상 수상작인 이 책은 다양한 소재를 추구하며 다채로운 상상력을 펼쳐낸 작가의 장점이 고스란히 살아 있는 작품이


벌집에 키스하기 (조너선 캐럴 지음/최내현 옮김, 북스피어)
사소한 듯 보인 사건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크게 크게 번져 나간다. 결말은 쉽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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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너선 캐럴 지음 | 북스피어 펴냄
작은 마을 크레인스뷰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놀라운 이야기들 <웃음의 나라>의 작가 조너선 캐럴이 쓴 [크레인스 뷰 3부작]에 해당하는 작품. [크레인스 뷰 3부작]은 뉴욕 근교의 작은 소도시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중심으로 한 일종의 연작 소설로, <벌집에 키스하기>는 슬럼프에 빠진 인기 작가 샘 베이어가 고향 마을을 찾아 휘말리게 되는 살인 사건을 그린 미스터리다. 베스트셀러 작가 샘 베이어는 어렸을


키리냐가 (마이크 레스닉 지음/최용준 옮김, 열린책들)
전통의 물적 기반이 사라진 사회에서 어떻게 전통을 이어나갈 것인가. 외부의 도움이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사회에서 외부와의 문화적 단절이 가능할까에 대한 사고 실험? 하지만 이를 보여주기 위한 에피소드와 결론은 식상하다.

키리냐가 1 상세보기
마이크 레스닉 지음 | 열린책들 펴냄
과학소설의 역사상 가장 많은 상을 받은 장편소설. 아프리카의 키쿠유 부족이 자신의 전통문화를 지키기 위해 지구 밖 소행성에 건설한 유토피아.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이 존재했던, 잃어버린 유토피아에 대한 우화를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면서 들려주는 소설. 양장본.


귀족탐정 다아시경: 나폴리특급 (랜달 개릿 지음/김상훈 옮김, 행복한 책읽기)
마술이 과학의 지위를 차지한 가상의 세계에는 셜록 홈즈와 왓슨 대신 다아시 경과 마법사 숀이 있다. 여전히 시간 보내며 읽기 편한 소설.

나폴리 특급 살인(행복한 책읽기 SF 총서 10) 상세보기
랜달 개릿 지음 | 행복한책읽기 펴냄
사이드와이즈 상 수상작 [귀족 탐정 다아시 경] 시리즈 3부작 완결판. 이 책은 귀족 탐정 다아시 경 시리즈의 대미를 장식하는 걸작 중단편집으로, 정치적 양분화로 더욱 혼재된 20세기 유럽을 배경으로, 더욱 치밀해지고 교묘해진 살인에 맞선 다아시 경의 해법을 생생하게 들려준다. 달리는 특급 열차에서 벌어진 또 다른 밀실 살인을 다룬 표제작 <나폴리 특급 살인>을 비롯해, 밀실 살인을 다룬 작품 중 걸작이라는 평


갈릴레오의 아이들 (그렉 이건 외 지음/가드너 도조와 편집/김명남 외 옮김, 시공사)
편집자로 유명한 도조와의 선집. 과학과 비과학의 경계를 다루는 소설들을 수록하고 있음. 하지만 인상적인 소설은 없음.

갈릴레오의 아이들 상세보기
가드너 도조와 지음 | 시공사 펴냄
인기 있는 과학소설의 거장들의 작품을 한자리에 모았다! 과학소설계의 유명 편집자 가드너 도조와가 '미신을 상대로 한 과학의 투쟁'을 주제로 엮은 과학 단편 선집. 어슐러 르 귄, 키스 로버츠, 조지 R. R. 마틴, 그레그 이건, 에드거 팽본, 크리스 로슨, 브렌던 뒤부아, 제임스 앨런 가드너, 아서 C. 클라크, 폴 파크,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마이크 레스닉, 로버트 실버버그 등 이 시대 가장 인기 있는 과학소설과 환상소설


우주만화 (이탈로 칼비노 지음/김운찬 옮김, 열린책들)
여행용 SF로는 너무 진지하다.

우주 만화(MR KNOW 세계문학 10)(페이퍼북) 상세보기
이탈로 칼비노 지음 | 열린책들 펴냄
20세기 이탈리아 문학의 거장으로 현실을 환상적이고 우화적인 기법으로 풀어낸 이탈로 칼비노 장편소설 『우주만화』. 상상을 뛰어넘는 기발한 공상의 세계를 통해 현실적인 문제들을 측면에서 찌르는 묘한 매력을 보여준다. 번역자의 말과 작가연보를 함께 수록해 작품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이 책은 작가의 이러한 환상적 상상력이 절정에 이른 작품으로, 각각 독립적이면서도 유기적인 25개의 단편들로 이루어져 있다. 시공


3. 빈수레가 요란
쌀과 소금의 시대 (전 2권, 킴 스탠리 로빈슨 지음/박종윤 옮김, 열림원)
흑사병이 유럽을 전멸시키고, 역사는 중국과 인도에서 만들어 간다. 윤회를 거듭하는 주인공들의 이야기. 거대 서사이면서 주제는 우주로 날아간다. 그리고 서양인의 동양 이해의 한계를 보여준다.

쌀과 소금의 시대 1 상세보기
킴 스탠리 로빈슨 지음 | 열림원 펴냄
유럽이 사라진 역사의 무대에서 세계사가 다시 시작된다! 로커스상 수상 작가, 킴 스탠리 로빈슨의 대표작. 현존하는 가장 탁월한 SF 작가라 손꼽히는 그가 쓴 이 책은 역자의 승자가 서양에서 동양으로 바뀌었다는 가정하에 유럽 없는 세계사를 다시 쓴 대체역사소설이다. 킴 스탠리 로빈슨의 해박한 인문학 지식과 사회학적 통찰력, 역사와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사유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소설은 흑사병으로 유럽 인구의


샹그리라 (이케가미 에이이치 지음/권남희 옮김, 열린책들)
이산화탄소 배출 기반 경제의 붕괴와 탄소 경제의 등장, 그리고 새로운 사회의 등장이라는 흥미로운 소재를 일본 신화와 연결시키면서 저자가 다루기 힘든 수준으로 이야기는 전개되어 간다.

샹그리라 상세보기
이케가미 에이이치 지음 | 열린책들 펴냄
제6회 일본 판타지 노벨 대상을 수상하며 등단한 이케가미 에이이치의 첫 장편소설. 환경 오염과 지구 온난화가 제시하는 미래에 대한 어두운 전망을, SF적 감각과 만화적 상상력을 결합시켜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환경 파괴로 인해 황폐해진 미래, 세계는 이산화탄소 배출의 억제를 최우선 목표로 하는 '탄소 경제'가 지배하고 있다. 열대 도시로 변모한 도쿄는 높이 4천 미터의 공중 도시 '아틀라스'를 만들어 시민들을 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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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River runs red

리뷰2008. 1. 4. 20:02
1990년 5월 30일 점심 무렵, 뉴욕 맨하탄의 엑슨(Exxon) 본사 앞에 대형 트레일러 한대가 멈춰섰다.

호주의 펑크 밴드 Midnight Oil이 "미드나잇 오일은 여러분을 춤추게 하지만, 엑슨은 우리를 병들게 한다(Midnight Oil Makes You Dance, Exxon Oil Makes Us Sick)."라는 플랜카드를 내걸고 트레일러 위에서 깜짝 공연을 시작했다.

약 40분간 진행된 이 공연에서 모두 6곡[각주:1]이 연주되었고, 이 장면은 흑백 다큐멘터리로 만들어졌다. 이 공연은 한 해전인 1989년 3월 24일 엑슨사 소유 유조선 발데즈호가 알래스카 앞 바다에서 좌초하며 프린스 윌리엄 사운드 만(Prince William sound) 에 약 24만 배럴의 원유를 유출시킨 사고에 대해, 엑슨 사의 책임을 묻고, 환경문제를 이슈화 하기 위한 항의 시위였다. (엑슨 원유 유출 사고 관련 기사: 서울신문, 위키피디아(영문))

사태 발생 직후 뒤늦은 방제 조치로 엑슨은 비난을 받았다. 엑슨은 상당한 비용을 들이며 방제에 나섰지만, 현재까지 25억 달러에 달하는 징벌적 손해 배상 지불은 거부하고 있다.

이 날의 레퍼토리 중 "River Runs Red"는 붉게 물든 강, 검은 비, 먼지만 남은 대지를 묘사하며 환경문제에 관심을 더 기울일 요구하고 있다.

미드나잇 오일은 환경, 원주민, 평화 문제를 음악으로 표현했던 유명 호주 밴드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폐막식 공연에는 호주 원주민에 대한 상징적 사과와 화해를 거부한 존 하워드(John Howard) 총리에게 항의하는 의미에서, 그의 면전에서 "미안합니다(SORRY)"라는 문구가 새겨진 상의를 입고 원주민 화해 문제를 주제로 한 "Beds Are Burning"을 연주하기도 했다.

밴드의 리더이자 보컬인 피터 개럿(Peter Garrett)이 정치적 활동에 전념하며 밴드는 해산했으며, 개럿은 2002년 하원의원 선거에서 당선되며 원내에 진출했고, 최근 호주 노동당의 총선 승리로 환경, 문화, 이주민 문제 장관으로 입각했다. 공연 장면은 다큐멘터리로 만들어졌으며, 이 영상의 판매 수익은 모두 그린피스(Greenpeace)에 기부되었다.

태안 앞바다로 몰려가는 자원 봉사자들을 볼때마다 대단한 분들로 감탄하지만, 그 보다 관련 책임 기업 앞에서 벌어지는 시위가 더 보고 싶다.



  1. Dreamworld, Blue Sky Mine, Instant Karma, River Runs Red, Progress, Sometimes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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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Happy New Year !

기타2008. 1. 1. 17:17

2007년 말에도 어김없이 라디오에서는 베토벤 교향곡 9번이 나왔다.

이 곡에는 나름의 기억이 있다.

고등학교때 음악선생님이 '음악교사 생활 25년 동안 너 만큼 노래 못하는 놈은 처음 봤다'라는 평을 하시면서, 가뜩이나 음악에 둔하다는 것에 자괴감이 있던 내게 대못을 박으셨다.

그렇게 말씀하신 분이 그래도, 교사로서 미안한 느낌이 있었는지, 음악을 잘 듣기라도 해보라고 했고,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을 제대로 해석할 수 있다면 높은 경지에 오른 것이다'라는 취지의 조언(?)을 해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선생님의 말은 '여러 음악을 조목조목 따져 듣고, 마침내 9번을 들어서 이를 해석할 수 있다면, 음악을 많이 들었다 말할 수 있다(그럼으로써 음악에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다)'는 의도였겠지만, 나는 '9번 교향곡이 정말 좋으니, 꼭 들어라'라고 이해했다.


일요일이나 휴일 아침이면 아침마다 9번 교향곡을 들었다. 군대에 간 뒤로 그 습관은 없어졌지만.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진은 런던의 하이드파크인가, 켄싱턴 파크인가의 화장실에서 찍은 베토벤 9번의 타일 악보.


그 뒤로 10년이 넘게 흘렀고, 예전처럼 정해놓고 듣는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생각나면 찾게 되는 것이 9번 교향곡이다. 하지만, 이 곡에 대해서는 아직 음악 그 자체로 보다 정치적 의미로 더 강하게 이해하고 있다.

이 곡의 정확한 명칭은 다음과 같다.

쉴러가 쓴 송가 '환희에 붙임'을 마지막 합창으로 한 대관현악, 4성의 독창, 4성의 합창을 위해 작곡되었으며,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폐하에게 심심한 경의를 가지고 루드비히 반 베토벤에 의해서 봉정된 교향곡 작품 125. 1826년 마인트 쇼츠 부자(父子) 출판사[각주:1]에서 출간한 교향곡 제 9번의 초판 스코어.

음악사적으로 서로 다른 두 교향곡을 연결시켰기 때문에 3악장과 4악장은 이질적인 느낌을 준다. 베토벤은 9번의 작곡을 1817년에 시작하여 1823년에는 3악장까지 완성시켰다. 그러나 그는 당시 겪고 있던 경제적 어려움과 건강 악화를 고려하여 원래 교향곡 10번의 피날레로 예정되었던 환희의 송가를 9번의 마지막 악장에 결합시킨다. 그런 이유로 들으면 들을수록 악장간 통일성이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쉴러의 환희의 송가는 베토벤의 작곡 동기였다. 그러나 어떤 관점에서 보자면 교향곡 9번의 환희의 송가 가사는 베토벤 자신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1803년판 쉴러의 시의 열여덟 절 중 단지 절반만 사용했고 또 자신의 시적 관점에 따라 그것을 자유로이 편집한다.

O Freunde, nicht diese toene!
오 친구들이여, 이 가락이 아닌
Sondern lasst uns angenehmere anstimmmen und freudenvollere!
더욱 즐거운 그리고 기쁨에 넘치는 노래를 함께 부르자!

Feunde schoener Goetterfunken,
환희여! 아름다운 주의 빛,
Tochter aus Elysium,
낙원에서 온 아가씨여,

wir betrenen, feurtrunken,
정열에 넘치는 우리들은
Himmlische, dein heilgtum,
그대의 성스러운 곳에 들어가리!

Deine Zauber binden wieder,
가혹한 세상의 모습에 의해 떨어진 것을
Was die Mode streng geteilt;
그대의 매력이 다시 결합시키는도다
Alle Menschen werden brueder,
모든 사람들은 형제가 된다.
wo dein sanfter fluegel weilt.
그대의 고요한 날개가 머무는 곳에서

Wem der grosse Wurf gelungen,
위대한 하늘의 선물을 받아
Eines Freundes Freund zu sein,
만인의 친구가 될 수 있었던 누구나
Wer ein holdes Weib errungen
여인의 따뜻한 사랑을 얻은 누구나
mische seinen Jubel ein!
이 환희에 그의 목소리를 더할 수 있게 하자

Freude trinken alle Wesen
환희는 모든 피조물이 누리는 것
an den bruesten der Natur,
태초부터 가슴에 안고
Alle guten, alle Boesn
모든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Folgen ihrer Rosenspur.
장미핀 환희의 오솔길을 간다.
Kuesse gab sie uns und Reben,
환희가 우리에게 준 입맞춤과 포도주
Eine freund, geprueft im Tod,
그리고 죽음조차 빼앗아 갈 수 없는 친구,

Wollust ward dem Wurm gegeben,
기쁨은 벌레에게도 주어지는 것
und der cherub steht vor Gott.
그리고 지품천사는 신 앞에 선다.

Froh, wie seine sonnen fliegen
수많은 태양이 기쁘게 움직이듯
durch des Himmels praecht'gen Plan,
하늘의 빛나는 계획에 따라
Laufen, brueder eure Bahn,
형제여, 그대들의 길을 달려라,
Freudig, wie ein Held zum Siegen.
영웅이 승리의 길을 달리듯.

Seid umschlungen Millonen!
포옹하라! 만민들이여!
Diesen kuss der ganzen Welt!
온 세상은 키스하라!
Brueder! ueder'm Sternenzelt
형제여! 별의 저편에는
Muss ein lieber, Vater wohnen.
사랑하는 주가 계시니,

Ihr stuerzt nieder Millionen?
억만의 인민들이여, 엎드려 빌겠느냐?
Ahnest du den Schopfer, welt?
세계의 만민이여, 조물주가 느껴지는가?
such'ihn ueber'm sternenzelt!
별의 저편에서 그를 찾으라!
Ueber sternen muss er wohnen.
별들이 지는 곳에 그는 있다.

그러나 악장간의 비일관성은 앞의 세 악장, 1, 2, 3 악장에도 존재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1악장에서는 비극적인 느낌의 주제가 나타나고 있으며, 2악장은 상대적으로 발랄한 느낌이다. 이에 비해 3악장은 안정적이며 조화롭다.

그래도 악장 간의 부조화는 3악장과 4악장 사이에서 가장 강하게 나타난다. 3악장이 끝난 후, 느닷없는 도입부와 함께 4악장이 시작하고 첼로가 나온 다음 , 다시 팀파니가 울려대고, 그리고 약간의 현악기로 긴장이 고조된 다음, 묵직한 음색의 첼로가 유명한 주제부를 연주한다. 악장의 주제가 상당히 뒷부분에 나오게 되는데, 그래서 어떤 음반에서는 이 부분만 따로 떼어 트랙으로 분리하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럼으로써 이 곡이 전하는 유토피아적 메시지가 극대화 된다. 베토벤은 베이스의 서창에 대한 초고에서 이전의 악장 간에 나타나는 의도적 부조화를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아니, 이러한 카오스는 우리에게 자신의 절망을 상기시킨다. 오늘은 기념일이다. 노래와 춤으로 이 날을 기리자.

첼로, 뒤이어 현악기가 주제부를 연주하고, 관악기와 팀파니가 곡을 변화시킨 다음에야 비로소 남성 독창이 나타난다. 남성 독창이 끝난 후 잠시 숨을 고른뒤에야 합창이 나타나고, 그럼으로써 감정을 고양시킨다.

한층 끌어올려진 감정은 상당히 빠른 속도의 코다로 이어진다. 첼리비다케 같은 지휘자는 이 부분을 매우 느리게 처리하지만, 감정의 고양이 극대화되었을 푸르트뱅글러의 51년 바이로이트 녹음은 인간의 연주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빠르고 갑작스럽게 끝나게 된다.

부분적으로는 부조화 같지만, 전체적으로는 상당히 아구가 맞아 떨어지는 것이, 톱니바퀴 돌 듯 딱딱 맞아 떨어지기보다 어물쩡 돌아가는 인간 세상에 더 적절한 구성처럼 느껴진다.

9번 교향곡에서 강조하는 환희가 상징하는 바는 이미 여러 사람들이 지적했는데, 다음 표현이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 문화의 위대한 긍정적 작품들에 묘사되고 있는 '유희(보상없는 노동)', 미, 형제애의 초월적인 영역들에 대한 의식을 상실한다면, 만일 우리가 교향곡 9번의 꿈을 상실한다면,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문명의 공포들에 대해 균형을 회복할 수 있는 아무런 수단도, 아우슈비츠와 베트남에 반대할 수 있는 아무런 방법도 남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메이너드 솔로몬 외, 윤소영 옮김, 베토벤 '윤리적 미' 또는 '승화된 에로스')

즉 9번 교향곡에는 공유할 수 있는 내용과, 공유해야만 할 이유가, 또 공유를 가능케하는 마력이 있다. 명 지휘자 푸르트벵글러는 결코 9번 교향곡을 스튜디오에서 녹음하지 않았다. 그것은 아마도 그가 합창을 공통의 경험으로 남겨야 하는 의미를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야만과 환멸의 시대를 넘기 위해 년말이면 9번 교향곡을 연주하는 진정한 의미일 것이다.

  1. 현존 악보사 중 두번째로 오랜 회사로서 1748년 창업했다. 바그너의 악보를 독점 출판했고 몇 개의 잡지도 출판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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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2007. 12. 29. 22:28
사용자 삽입 이미지

Marie Denise Villers, 자화상(추정)


the Met에서 돌아다니다가 눈에 띈 그림 한 점.

Marie Denise Villers라는 19세기 초반 프랑스 여자 화가의 자화상으로 추측되는 그림이다. 이 그림은
1801년의 살롱전에 걸렸다고 한다.

아마도 사회적 관계에서의 문제일텐데, 그 당시 많은 경우 여자 화가의 그림은 남자 화가의 그림으로 공개되었다고 한다. 저 그림도 얼마전까지는 David의 작품으로 여겨졌다고 한다.

하지만, 그림은 그 자체로서 작가가 여성일 것이라는 강한 인상을 심어준다.

또렷한 시선으로 상대를 응시하는 그림 속 여자의 모습이 자신의 소수자적 처지에 대한 냉소와 절망, 자기 분야에 헌신을 하는 사람 특유의 자신감과 한편으로의 후회를 동시에 보여주는 듯한 기분을 자아내고 있었다.

깨진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마치 싸우는 듯 또는 포옹하고 있는 것처럼 연인을 보면, 마음속의 불안감, 내가 연애를 다시할 수 있을까 같은 모습을 보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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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2007. 12. 29.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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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zanne, Man with Crossed Arms


The Met에서는 세잔의 초상화 한 점이 눈길을 잡아 끌었다.

초상화 제목에 사람 이름도 없고 그냥 팔짱을 낀 사내(Man with Crossed Arms)라고만 적혀 있었다.

사시가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로 얼굴부위의 시선과 비례가 옆으로 기울어져 있고, 어깨선과 아래쪽 벽선도 그렇다. 그리고 왼쪽 팔도 이상한 형태를 띠고 있다. 팔과 손이 따로 놀고 있는 셈이다. 세잔의 다른 정물화에서처럼 한 화면에 다중의 시점들이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구도 보다는,

입가의 작은 냉소와 째려보는 눈. 게다가 팔짱 낀 자세, 이런 표정과 자세의 사람이 의례히 풍기기 마련인 오만하고 고집 센 냄새가 진동을 한다.

내가 딱 좋아하는 분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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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 작품으로만 친다면 베니스의 페기 구겐하임에 가 보고 싶었다. 뉴욕 구겐하임에는 무엇이 있는 지 잘 몰랐다. 뉴욕의 솔로몬 구겐하임은 건물이 더 보고 싶었다. 구겐하임에서 최고의 수확은 특별 사진전 Speaking with Hands 였다. 개인 컬렉션으로는 참으로 방대한 양이었다. 그것도 손이라는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수집된.

사용자 삽입 이미지

Gabriel Orozco, My Hands are My Heart



사진은 캡션이나 제목을 통해서(심지어는 캡션이나 제목이 의미를 바꾸어 버리기도 하지만) 그 의미를 명확히 드러내기 마련인데, 이 사진은 그 자체로서, 제목이 없이도 그 의미를 충분히 드러내고 있었다.

'손'이 중심이고 전부 '손'을 전면에 내새운 것이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그 안에서 세부적으로 또 나뉘어서 전시되고 있었다. 죽음과 삶의 경계의 소주제가 아직도 기억에 난다. 갓난아기의 손을 찍은 사진과 죽어가는 어린 아이의 손을 찍은 사진은, 사진이 줄 수 있는 충격을 충분히 전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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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사랑과 평화

리뷰2007. 12. 29. 22:20
단순한 선 몇 개로 사람을 표현하고 있는 Keith Haring이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정말 우연한 장소에서 이 사람 작품들을 마주하게 되었는데, 하나는 SF MOMA 맞은 편 건널목에 서 있는 조형물이었고, 다른 하나는 Nob Hill의 Grace Cathedral에 볼 일 보러 들어갔다가, 볼 일은 못보고 찾은 AIDS Interfaith Memorial Chapel의 제단화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Keith Harring, 제단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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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Tide Table

리뷰2007. 12. 29. 22:19

파리가 인상파의 주무대라면 미국, 특히 뉴욕은 현대추상미술의 본산이지 않을까 넘겨짚어 본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뉴욕의 MOMA는 재개관 준비중이었고, 전시품의 일부만이 퀸스에 남아 있었다. 휘트니도 또다른 선택이 될 수 있었겠지만, 솔직히 퐁피두 센터에서 한 번 데인 이후로 현대추상미술을 굳이 찾아가서 보고 싶지는 않았다.

현대추상미술을 보면 '타르코프스키의 느림을 음악에서 강요받고 싶지 않아 첼리비다케는 듣지 못하겠다'던 친구의 말이 떠오른다. 휴식의 일환인 미술작품 감상을 '이것이 파이프이냐 아니냐'로 골머리썩혀가며 보고싶지는 않았다.

그래도 마침 일정중 샌프란시스코의 MOMA가 공짜인 날이 있길래 다녀왔다. 공짜여서뿐 아니라 팝아트 특별전이 있었다. 앤디 워홀, 리히텐슈타인 등등 유명한 팝아트 작가들은 죄다 모여 있었다.

뉴욕만큼은 아니겠지만, 서부에서는 샌프란시스코가 어느 정도 미술계의 중심일테니 꽤 충실한 컬렉션이 아닐까 기대했는데, 다행이었다. 하지만 책에서 보던 것 이상으로 Pop Art는 심심한 장르였다. 그것은 마치 풍요로운 미국이 주는 이미지가 찰라의 만족감에 지나지 않았던 것과 같았다.

이 미술관에서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남아공 출신이라는 William Kentridge의 애니메이션과 드로잉들이었다. 특히 Tide Table이라는 작품이 인상적이었는 데, 목탄을 이용해서 그린 듯 하고, 따라서 소재 특유의 굵은 선이 강한 이미지를 형성한다. 게다가 작품의 내용도 녹록치 않아서, 남아공의 정치/사회적 문제, 특히 AIDS로 인한 사망을 강하게 다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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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 삽입 이미지

Eugene Burnand, Les Disciples


오르셰는 대단했다. 친구 말대로 '미술 교과서'에 나오는 그림은 여기에 다 있었다. 인상파를 중심으로 한 컬렉션이기 때문에 더더욱 친숙할 수 밖에. 고흐와 르느와르의 방은 사람이 넘쳐났다.

하지만 교과서에는 보지 못했지만, 익히 알고 있던 작품 하나를 여기서 보았다. 서경식의 '나의 서양미술 순례'의 한자락에 나오는 그림이었다. 저 두 사람은 예수의 시체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는 베드로와 요한이다.

선생의 부활을 상상하기 보다는 시체가 사라졌다는 해괴한 소식에 더 놀랐을 두 제자의 황망한 표정과 잰발길이 느껴진다. 서경식 선생은 마치 극장 간판 그림같다고 까지 말했지만, 선생의 느낌처럼 무엇엔가 화들짝 놀라 떠밀리듯 달려가는 사람의 표정은 군대 가기전 새천년 맞이 기타 등등의 이유를 대고 떠난 내 여행의 의미를 다시 묻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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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Rhapsody in Blue

리뷰2007. 12. 29. 18:07

지방 사람들이나 나이 드신 분들이 아직도 간혹 하는 말 중에, 서울에 오면 높은 빌딩 들과 정신 없이 움직이는 사람들 속에서 어안이 벙벙해진다고 그런다.
 
국제도시 서울이라고 서울에 사는 사람이라면, 세계 어느 대도시에 떨구어 놓아도 쉽게 놀라지 않을 것이라는 게다. 정말이지 서울의 규모, 그리고 삶의 속도는 세계 어디에 내 놓아도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맨하탄에서는 단박에 서울 촌놈이었다. 좁은 땅 위에 빼곡히 들어선 월스트리트의 마천루 숲은, 빌딩 그림자로 겨울 눈이 녹지 않을 것 같을 정도였지만, 그런 만큼 볼라치면 목만 아프게 올려다 봐야할 뿐이어서 내내 관심 밖이었다.
 
그러나 도시의 속도감은 틀렸다. 여직 가본 대도시들, 런던, 파리, 홍콩, 싱가폴, 도쿄, 바르셀로나 등과도 전혀 다른 차원이었다.  

서울과 동경의 속도감은 출퇴근 시간에나 존재하는 것이었는데, 이 곳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의 속도라는 것은, 출퇴근 시간을 막론하고 항상 빠르고 빠른 것이었다. 그들의 움직이는 모습은 마치 환타지아의 랩소디 인 블루 챕터와 비슷했다.

심지어 조깅하는 사람들 조차.
 
한손에는 서류가방과 다른 한 손에는 텀블러나 커피 컵을 들고 옆, 뒤도 안돌아보고,
신호등은 무시하고 차 오는 방향에만 시선을 둔 채 길을 건너가고,
얼레벌레 넋 놓고 다니는 관광객들을 요리조리 피하면서 자기의 페이스로 바쁘게 걸어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랩소딘 인 블루의 속도감이 비로소야 제대로 느껴졌다.
 
그러한 삶 속에서 Rockefeller Park를 알려준 친절한 할머니의 도도하면서 어떤 면으로는 오만한 느낌의 말투,
The Met 가는 법을 알려주고는 당당하게 25cent를 요구하던 할아버지,
Wall st.의 Bronze Bull을 알려준 경비원의 심드렁하면서 냉소적인 어투,
영어를 한 마디도 못하던 숙소의 히스패닉 아줌마의 No Good,
Delarcorte Theater에서 대기표와 입장표를 바꾸는 데, 규정보다 더 많은 표를 받아 가는 것 아니냐고 항의하는 젊은 사람,
그러면서 우리에게 남는 표는 줄 수 없느냐고 물어보던 그 사람의 일행들과 함께,

뉴욕은 속도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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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Save me

리뷰2007. 12. 29. 17:57

여름의 맨하탄에서는 허드슨 강변을 따라 있는 공원에서 무료 공연이 이어졌다. Aimee Mann의 공연도 그렇게 보게 되었다.


알고 있는 노래라고는 단 두 개, 400miles와 save me 뿐인, Amee Mann의 연주는 듣다 자버렸다. 야외 공연의 특성상 집중도가 떨어지고, 분위기가 휘발되어버리기 십상이서 그러기도 했지만, 노래의 느낌이 거기서 거기여서 그런 게 더 컸다고 변명해 본다.
 
공연 중간에 본인도 인정했다. '분위기 참 안 뜨네요. 야외 공연이라 그런가?, 제가 변명의 여왕이랍니다. 하하하...'
 
그러나 시간이 지날 수록 그녀의 음색과 백 밴드의 연주는 정점을 향해 올라갔다. 결국 돌아오는 길에 중고 cd 가게에서 save me가 들어 있는 magnolia ost를 사게 만들고야 말았다.
 
노래 하나 끝나면 박수나 간간히 치고, 가끔가다 흥에 겨워하는 아저씨 하나 둘이 일어나서 어깨춤을 추는, 그저 그런 분위기의 공연이었지만, 나를 놀래킨 것은, 마지막 연주가 끝나자,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열광적인 기립박수였다. 마치 냉정한 평론가가 한마디 말도 없이 입을 앙다문채, 조용히 감상을 마치고, 격정의 찬사를 쏟아내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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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LA 스케치

리뷰2007. 12. 29. 17:50

리쿼에서 맥주를 살 때, YMCA 숙소 앞 노숙자들의 본거지를 지나다닐 때, 

거리에서 25센트 삥뜯길 때,
유니온 스퀘어에서 노숙자에게 담배 나눠줄 때,
잔디와는 상관없이 돌아가는 호스텔 앞 잔디밭의 스프링쿨러를 볼 때,
5번가의 화려한 쇼핑가를 지나다닐 때,

그 때마다 누군가가 머리 속에서 계속 예의 타령같던 멜로디처럼 중얼거리는 것 같던 노래.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야기를 노래로 들려주던 꾼이 현대에 부활한다면 아마 정태춘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이 노래를 들으면서 해 봤다.
 
정태춘의 매력은, 자기가 보고 있는 세상에 대한, 자신만의 정확한 표현. 자신만의 견해라는 것도, 자신만의 정확한 표현이라는 것도 가지지 못한 사람이 많은 시절에 얼마나 탐스런 가치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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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나성에 가면

리뷰2007. 12. 29. 17:39

이제는 디지털 카메라와 이메일만 있으면, 여행 중에도 거의 실시간으로 소식과 풍경을 전할 수 있다. 메신저나 전화도 물론이고.

하지만 광속과도 같은 전자 우편은 여행지에서 산넘어 물건너 느리게 오는 직접 쓴 편지나 엽서 한통만큼 마음을 짠하게 하지는 못한다.

괴발개발 쓴 글씨지만, 알 수 없는 나라, 보지 못했던 풍경의 그림과 독특한 우표만으로도, 이국의 정취와 보낸 이의 즐거움이 느껴진다.

크라코프 성 아래 잔디밭의 여름 오후 햇살과 프라하 카페에서 비를 피하며 친구들에게 편지를 쓰며, 결국 그녀에게는 보내지 못했다.

'당신과 함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말이 안떨어졌다.

Joni Mitchel이 슬픈 노래를 참으로 슬프게도 불렀는데, 이한철과 불독맨션은 슬픈 노래를 참 즐겁게 부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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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권에서 글 좀 읽고, 6-70년대의 히피 세대는 Joni Mitchel을 듣는다고 그랬던가? 닉 혼비의 About a boy에선가 그런 비슷한 구절을 읽은 것 같은데. 


원래 Joni Mitchel 자신이 1969년에 불렀던 노래는 내 마음 속에 들어온 자전거로 유명한 CF에 사용된 경쾌한 곡이었다.

그런데, 이 노래를 영화 'Love Actually'를 보면서 처음 들었다고 생각했다. 워낙 분위기가 달라서.

남편이 애인에게는 보석을 선물하고 자신에게 Joni Mitchel CD 한장을 선물하자 Emma Thompson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눈물을 훔치면서도 아이들에게 웃음을 보이던 장면에서 흐른 Both Sides Now는, 오롯이 한 마디 한 마디 가사가 들리며 처연하면서도 비장했다.

징글맞게 싸우고, 무릎 깨져가며 파리 시내를 뒤져 케잌을 사다 드리며 머리를 조아렸고,
식당과 빵집만 보이면 쪼르르 달려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빵을 바라보았고,

그렇게 같이 걷고 같이 웃던 유럽의 골목을 떠올리며 지루한 행군을 참았는데,

카를교에서 키스하는 연인들을 시샘하며, 바벨 성 아래 잔디밭에 누워 크라코프의 푸른 하늘을 보며,

사랑은 주는 것과 받는 것, 내가 많이 주었을까 많이 받았을까, 그렇게, 대차대조표라도 그리고 나면 마음이 나아질까.

아니 그것은 결국 잘못된 기대였다.

센텐드레의 기념품 가게에서 그녀가 좋아할 예쁜 모자를 보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같이 손 잡고 뽀뽀하며 걷던 파리 시내를 홀로 걸으면서, 양희은의 노래가 들렸다.

그렇게 내 마음의 20대는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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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 삽입 이미지

Israel


내게 여행은 도피처였다. 다락방이었다. 밥을 먹으려면 다락을 내려와야 했듯이 도피처는 도피처일 뿐 내가 계속 있을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유명한 두 곡이 절묘하게 연결된 이 노래를 듣고 있으면 무지개 저 너머에 또 다른 세상이 있을지 모르지만, 결국 내가 있는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인가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아니, 특히 잔인한 베트남전의 기록 필름과 What a wonderful world가 오버랩되는 Goodmorning Vietnam의 장면을 떠올리면,
발딛고 있는 세상이 아름다운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내가 택한 여행이 도망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하와이안 기타의 아름다운 선율에서 이런 기분을 갖는다는 것은 죄일지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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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Africa

리뷰2007. 12. 29. 17:09

사용자 삽입 이미지Toto-Africa


캄보디아 앙코르 와트를 포함한 인도차이나 반도와 케냐를 비롯한 아프리카 대륙은 꼭 가보고 싶은 여행지이지만, 그 곳을 눈으로 보면 결코 마음이 편해지지 않을 것 같아 항상 망설이게 된다.

그래도 마음 한 편에서는 이 곡처럼 토속적인 타악기와 초원을 뛰어다니는 야생의 임팔라와 치타가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처럼 펼쳐진다. 랜드로버를 타고 동물 무리를 쫓거나, 프로펠러 비행기를 타고 홍학 떼 위를 날아가는 영화 속 한 장면을 그려보기도 하고. 리빙스턴 폭포 위로 떠오르는 무지개도 그려본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는 전 국민의 10% 이상이 에이즈 감염자라는 남아공의 보도와 르완다의 대학살, 기아, 가난이 그려진다. 편하게 여행을 하기에는 너무나 가혹한 곳일 것만 같은 생각에 다시금 무거운 기분이 든다.

p.s. 스튜디오 음반은 LP로만 있어서 공연실황으로 녹음된 mp3를 넣어다니는데, 어둠의 경로로 구한 터라 수록 앨범이나 발매년도를 모르고 있다.(스튜디오 버전의 원곡은 ToTo IV(1982)에 수록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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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Englishman In New York

리뷰2007. 12. 29. 17:07


메탈리카와 건즈앤 로지즈를 듣던 시절에는 스팅과 루 리드가 들리지 않았다. 이제는 반대가 되었지만.

영국인은 아니지만 뮤직비디오에서처럼 스카이라인을 쳐다보며, 센트럴 파크를 걸으며 맨하튼에서 들은 "I'm an alien, I'm a legal alien"는 실감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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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Shall We Dance?

리뷰2007. 12. 29. 17:05

늘상하는 말로 대선에서 누구를 찍을 지 술잔을 던지며 언쟁을 벌이더라도, 여름날 맥주 한 잔을 같이 할 수 있는 친구가 좋은 친구라고 생각했다. 


둘다 샌님이라 한바탕 주먹질을 하지는 않더라도, 사회당원이 왜 노무현을 찍느냐의 문제를 놓고 밤새도록 언쟁을 벌일 수 있는 친구가 있었다.

크라코프 성 아래 잔디밭에서 뒹굴거리며, 프라하의 필스너 우르켈을 마시며, 그가 생각났다. 80년대 아바도의 베토벤은 앨범 표지만 아름다울 뿐이라는 시시껄렁한 먹물티 나는 농담이나, 이문열에 대한 과대평가와 역겨움을 안주 삼아 한잔 들이키고 싶었다. 많은 것을 함께하지 않았지만, 그 누구보다도 서로를 이해한다고 생각했다.

2005년 가을, 졸업도 못하고 여자 뒤꽁무니나 쫓아다니는 복잡한 심정으로, 그를 찾아 버스 정류장에서 보광사로 올라가는 길에서 Shall We Dance가 들렸다. 그해 여름 홍대에서처럼 너와 다시 춤을 출 수 있으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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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Are You Going With Me?

리뷰2007. 12. 29. 17:03

Pat Metheny를 별로 좋아하지 않고, 지금도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좋아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그의 음악이 주는 촉각적 느낌이 싫을 때가 있다. 그의 노래들은 맨질맨질한 금속 거울같다. 상당히 잘 다듬어져 있고, 광도 나지만, 골백번 만져도 손때 한 번 묻지 않을 듯 해서, 꼭 외계물질로 만들어진 것 같다. 생명이 없는 것 같은 금속성의 미끄덩한 느낌이 들어서 싫다. 마치 포르노에 종종 등장하는 미끈한 로케트 모양의 거대한 금속성 딜도를 듣는 듯했다.


하지만 타이루거(太魯閣)로 가는 기차에서 맛없는 타이완 삐주를 곁들여 들은 'Are you going with me?'는 가슴을 쳤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집에 계신 부모님 생각이 났다. 추석에 대한 좋은 기억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지만, 굳이 집을 나와 있을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사나흘 지나면 돌아가야 할 것. 마음을 기대고 싶어도 기댈 사람이 없었다. 눈물이 났다.

나를 돌아보며 천진한 웃음을 지은 앞자리 소녀는 울다가 웃던 내 표정을 어떻게 보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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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출발

리뷰2007. 12. 29. 17:01

티렉형이 내게 알려준 여러 가지 중 아직까지 잊어버리지 않은 몇 안되는 것이며, 적어도 앞으로 10년은 잊어버리지 않을 것 같은, 어쩌면 평생을 갈 수 있을 것 같은 음반, "어떤날 2."


'출발-초생달-하루-취중독백-덧없는 계절-소녀여-그런 날에는-11월 그 저녘에'로 이어지는 이 앨범은 굳이 여행이라기 보다는 만남과 헤어짐에 대한 노래들이라 할수 있지만, 그 전개는 한편의 로드무비같다. 특히 첫 네 곡은 여행자의 가슴을 적시는데, 이 중에서도 '출발'의 멜로디와 가사가 이율배반적이라는 점에서 이 리스트의 맨 위에 올린다.

듀오의 이름을 일생에서 중요한 하루로서 '어떤 날'일 수 있음과 동시에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일상 중의 어느 하루인 '어떤 날'로 해석할 수 있는 것처럼, 이 노래는 세상사는 마냥 좋지도 마냥 나쁘지도 않고("외로움을 지워도 그리움을 만난다"), 일상은 전혀 변하지 않는 것 같지만 소소한 차이들은 존재한다("거진 엇비슷한 의식주로 만족하면서 손톱은 은근히 자라난다")는 점을 조용한 어조로 알려준다.

이 곡을 듣고 있으면,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멋진 사진이 출입국 심사장의 긴 행렬, 장거리 비행의 소음과 맛없는 기내식, 알 수 없는 말만 지껄이는 기분 나쁜 눈빛의 세관원, 바퀴벌레 다니는 호텔, 무섭게 생긴 삐끼 등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가슴아픈 사실을 일깨워 주는 한편, 집나가는 고생을 감수하겠다는 마음을 다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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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에서
요리사는 프랑스인이고,
기계 수리공은 독일인,
경찰은 영국인,
연인은 이탈리아인,
조직관리는 스위스인이지만,

지옥에서
요리사는 영국인,
경찰은 독일인,
기계 수리공은 프랑스인,
연인은 스위스인,
조직관리는 이탈리아인이다.”
어디 한 군데 살아 보지 않고, 일회성으로 스쳐지나가면서 보고 느낀 것들을 일반화 시켜서 말하기는 힘들지만, 대개의 사람들도 비슷하게 얘기하는 걸 보면, 남한이나 마찬가지로 이탈리아도 어기적 어기적 맞춰가는 나라, 관리의 귀재라는 로마제국의 후손이라기 보다, 좋게 말해 임기응변에 능한 사람들로 보일 뿐이다.

로마에 가면 로마 법을 따르라고. 로마 떼르미니 역에 모여 있던 경찰들은 사고 처리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피자 내기 게임 중이었고, 빅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 기념탑 앞의 도로에서 스쿠터는 폭주족 처럼 질주하고 있었고, 그 와중에 그 길을 무단횡단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5만원을 환전하면 당당하게 1만원을 수수료로 떼어가는 것이 로마의 법이었다.

한때 인터넷 상에서 인기였던, 'Italian들이 다른 European들 처럼 행동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께 바칩니다'로 시작해서, 오가잡탕의 대명사 '피자/스파게티'로 끝을 내는 Europe and Italy라는 플래시를 본적이 있는지? 그걸 보면, Italy를 South Korea로 바꾸어도 다들 고개를 주억거리게 되지 않던가?

<보제토라는 걸출한 애니메이터의 이 작품은 그의 홈페이지(http://www.bozzetto.com/welcome.htm)에서도 감상할 수 있다.>

로마에서 출발해서 피렌체로 가는 기차는 40분 늦게 출발했지만, 피렌체 도착은 시간표 보다 20분을 빨리 도착해버린, 나의 엽기적인 경험을 되새겨 본다면, 무솔리니가 한 일은 기차를 제 시간에 다니게 한 것 뿐이라는 냉소(이말의 진위를 가리기 위해 실증 연구한 결과 실제로는 무솔리니 때 연착 횟수가 더 많았다는 글을 본 적이 있지만)가 충분히 먹혀들 수 있는 그런 동네가 아닐까 싶다.

이네들의 정치 지형과 이합 집산은 예측을 불가능하게 한다. 자고 일어나면 야당이 여당과 한 패가 되어버리는 게 다반사인 나라니까. 최장집 선생님의 표현과 설명에 따른다면, 정부의 집권 엘리트들이 안정적인 의회 소수파가 되었을 경우 다수파를 형성하기 위해, 야당의원들을 포섭하는 공작정치와 이를 가능케 하는 비공식적인 수혜관계(뇌물관계의 학적 표현으로는 참 적절하지 않은가?)에 대해 '변형주의'(transformismo=transformation)라는 공식 학술용어까지 있으니까.

조금 다른 맥락이지만, 1996년, 가열찬 투쟁의 상징이나 다름 없었던 이탈리아 사회당이 당명조차 바꿔가며, 중도파와 좌파의 연합(올리브나무동맹)을 통한 집권조차 그렇고.

자본주의의 심장(지금은 르네상스의 보고로서 관광객으로 먹고사는 도시이지만, 피렌체는 고리대금업의 도시로서 손꼽히는 자본주의 지역이 아니었던가)에 내리 꽂히는 저 낫과 쇠망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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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가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서슬 퍼런 혁명의 상징이라기 보다, 술 마신 대학생들의 치기와 반달리즘으로 뒤범벅되어 버린 앙증맞은 장난일 뿐이기만 하여, 오가잡탕 분위기의 이탈리아 정치와 그 나라의 인상을 다시 생각나게 한다.

우스개로 시작했으니, 우스개로 끝내 보자.

UN에서 설문조사를 했다. "다른 나라의 식량의 과잉 생산과 부족에 대한 당신의 견해를 솔직하게 말씀해주십시오."
유럽인은 '부족'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프리카인은 '과잉'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미국인은 '다른 나라'의 의미를 물어왔다.
중국인은 놀라면서, '견해'의 말뜻을 물어왔다.
반면, 이탈리아 국회에서는 '솔직하게'의 뜻을 놓고 여전히 싸우고 있다.
(The results of a poll made by United Nations came out. The question was: "Please, tell us honestly what is your opinion about the abundance vs. scarcity of food in the rest of the world." The results were as follows:
# The Europeans did not understand what was meant by "scarcity".
# The Africans did not understand "abundance."
# The Americans asked the meaning of the "rest of the world".
# The Chinese, puzzled, asked for an explanation of "opinion".
# Meanwhile, in the Italian Parliament, they are still debating the meaning of "honest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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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해외여행의 겉모습은 나름의 졸업 자축연이었지만, 그 보다는 새 밀레니엄을 이 땅에서 맞이하면 인생이 꼬일 것 같은 근거 없는 기분에 더 나가고 싶었다. 인생이 항상 뜻대로 되지는 않는 법. 결국 불친절한 학사행정으로 2000년 1월말이나 되어야 떠날 수 있었지만.

목적지는 항상 계획과 즉흥의 사이에 있었다. 기차를 타고 가다 마음에 들어 내린다거나, 아리따운 아가씨의 뒤를 쫓아 내리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낯선 곳에 대한 동경만큼이나 두려움은, 같은, 때로는 더 크게 다가왔다.

하지만 페르라셰즈는 가보고 싶었다. 그곳을 가기 위해 비행기를 타지는 않을 테지만, 파리에 가면 꼭 가고 싶었다. 첫 해외여행이었던 2000년 겨울 유럽 여행의 마지막 날, 그곳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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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이면 한국행 비행기를 타야 했다. 솔직한 심정으로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돌아와야, 군대 외에는 선택의 길도 보이지 않고, 답답하기 그지없는 반도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어디에서 살던지 일상이란, 탈출구의 너머에 항상 존재하는 것에 지나지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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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여기에 오고 싶었을까. 먹물든 사람 특유의 관념적 좌파주의, 고종석의 글이 갖고 있는 감성, 삶에 대한 비루한 애정과 생존의 확인......
'나는, 한 주일의 시작을 으레 그렇게 하듯, 페르 라셰즈 묘지로 향했어. 죽은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위로받기 위해서.

그리고 11구역의 프레데릭 쇼팽과 89구역의 오스카 와일드에게 잠깐의 위로를 받은 뒤, 이 묘지 순례의 마무리를 으레 그렇게 하듯, 97구역 앞의 '코뮌 전사들의 벽'앞에 이르렀지. 거기서 산화한 영혼들의 진짜 불행으로, 내 얄팍한 불행의식을 세척하기 위해서.'(고종석, ‘광주의 5월, 파리의 5월’, “고종석의 유럽통신”에서)
두번 째 파리행에서는 돌아오는 항공편이 밤 늦게 출발해서, 오후 5시까지 여유가 있었다. 5년 만에 페르 라셰즈를 다시 찾았다.

5년전 묘지 입구에서 꽃이라도 사갈까 하다 그건 정말이지 속물이겠다 싶어, 잠시 망설이다 10프랑을 주고 지도를 샀다. 묘지에서 무슨 지도냐 생각했지만, 안샀다면 낭패를 볼 뻔 했다. 감만 믿고 돌아다니가는 출구도 못 찾기 십상일 정도였으니까. 5년이 지나도 지도는 유용했다. 죽은 자들이 이사를 다니지는 않을테니까.
 
48구역의 발자크에서 시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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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의, 6구역의 짐 모리슨에서 끝난 2시간여의 묘지 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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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말로 커밍아웃된 바람에 인생 꼬여 버린, 그러나 지금은 뭇 여인네들의 키스 세례를 받고 있는 오스카 와일드의 스핑크스를 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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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의 가장 구석에 가면, 2차대전중 희생된 유태인에 대한 기념탑과 바로 그 코뮌 전사들의 벽이 있다. 벽은 아무말 없이 밀리고 밀려 벼랑끝에서 떨어지는 자들의 모습을 조용하지만 강력한 의미로서 전달하고 있었다.

파리 코뮌의 마지막 하루, 파리 시내의 바리케이트에서 밀리고 밀려, 시 외곽의 공동묘지에서, 그리고 가장 구석까지 밀려 더 이상 갈 곳이 없어, 손을 들고 나왔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정부군의 총알 세례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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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꿈이란 이렇게 밀려 사라지는 것이었을까. 나즈막한 벽에 이름조차 없어 '전사들의 벽'으로 뭉뚱그려진 코뮈나드들에 반해 건너편 프랑스 공산당 지도자들의 화려한 무덤은 또다른 대비가 되었다.

죽은 이들을 위로할 만큼, 그들에게 위로를 받을 정도로 혁명의 부채를 지고 있지 않지만, 여지껏 배워온 유럽사의 함축이 이 곳에 담겨져 있다고 생각해 왔다. 혁명, 문화예술 그리고 보헤미안적 자유 등등.

보헤미안적 자유의 20세기 후반 상징은 짐 모리슨일 것이다. 그의 묘지에 서 있는 흉상은 도난당한지 오래고, 60년대의 아이콘으로 그를 기억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낙서가 반복되고 있고, 경찰 두 명이 산책인지 감시인지 모르게 계속 서성대는 곳이다. 아마 페르 라셰즈를 찾는 상당수의 사람들이 짐 모리슨의 묘지를 찾아오는 것일 것이다. 죽은 자를 찾아오는 산 자의 끊임없는 행렬과 숙명.

이 묘지의 유명인사들, 11구역의 쇼팽, 48구역의 발자크, 85구역의 마르셀 프루스트, 87구역 Crematorium의 마리아 칼라스와 이사도라 덩컨, 44구역의 이브 몽탕과 시몬 시뇨레, 89구역의 오스카 와일드, 꼬뮌전사의 벽, 97구역의 에디트 피아프, 6구역의 짐 모리슨 등 관광객마다 찾는 사람은 틀려도, 그 주변에 가면 말도 서로 건네지 않지만 눈빛 만으로도, 96구역의 모딜리아니를 못 찾아 나와 같이 헤매던 중년의 서양 남자를 보면서도, 동일한 사람의 무덤을 찾고 있다는 묘한 동질감을 주고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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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나는, 무관심이 넘치는 대도시에서 죽은 이의 무덤을 일부러 찾는 중이다.

<어떤 감정도 소용돌이치는 사건들의 흐름을 견뎌내지 못한다. 그것들의 밀물과 조류를 거슬러 헤엄치려고 노력하다보면 열정의 강도가 줄어든다. 사랑은 욕구로 축소되고, 증오는 변덕으로 격하된다. ...... 살롱에서나 거리에서나 아무도 없어도 되는 사람은 아니지만, 절대 없으면 안되는 사람이나 절대적으로 불건전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 파리에서는 모든 것이 용납된다. 정부나 기요틴이나 교회나 콜레라까지도 허용된다. 파리 사회에서 당신은 항상 환영받을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 없어도 아무도 당신을 찾지 않는다.>(발자크, "인간희곡"; 데이비드 하비(2005),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 생각의 나무, p.53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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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교토, 이것저것

여행2007. 1. 1. 21:58
1. 일본 여행 중 안 좋은 기억이 하나 있다. 시도 때도 없이 복통이 찾아오는 터라, 갑작스레 화장실을 찾아야만 하는 사태가 발생했었다. 이름이 기억 나지 않는 호텔의 화장실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일어섰다.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그때만 해도 듣도 보도 못한 비데가 있었던 것이다.

신기한 게 화장실에 있나 보다 그냥 일어서면 되었으나, 궁금증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버튼을 유심히 살펴보며 내린 결론이 레버로 물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버튼을 눌러서 물을 내린다였다. 내심 훌륭한 추리라 생각하고 자화자찬하고 그쳤으면 될 것을, 굳이 '水'자가 들어간 버튼을 눌렀다. 궁~궁~궁~ 뭔가 돌아가는 소리가 나더니 갑자기 얼굴로 물이 튀기 시작했다.

허둥지둥 움직이다 오줌 싼 모양처럼 바지 가랑이를 다 적시고 말았다. 저 요상한 물총 기계를 멈추고 바지를 말리고 나가야 했으나 끌 방법을 알 수가 없었다. 결국, 바지를 적신 채 그냥 나와서 시내를 돌아다녀야 했다.

교토에서 가장 비싸게 먹은 식사는 豆水樓의 2,000엔짜리 도시락 세트였다. 유바(湯葉)를 먹어보겠다는 일념으로 찾아간 집이었고, 소원성취했다. 떡구이나 두부 튀김 등 일부 단품의 맛이 고르지 않았지만, 나쁘지 않았다. 2층의 폐쇄형 다다미방이라 분위기도 호젓했고 점심을 지난 시간이라 종업원들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아마 여자와 단둘이 갔으면 뭔일을 벌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번에도 문제는 화장실에서 생겼다. 밥 먹기 전 속이 안 좋아서 화장실을 갔는데, 물을 내리고 손을 씻으려고 보니 세면대가 안 보였다. 간신히 서 있을 수 있는 좁은 공간을 두리번두리번 아무리 찾아봐도 세면대는 안보였다. 어디서 물 흐르는 소리가 나는데, 이건 또 뭔 소린지. 여자 화장실에서는 볼일 보는 소리를 감추려고 물을 흘려보낸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여긴 남자 화장실이고...... 수건이 걸려 있는 것으로 보아 손을 씻을 수는 있는 게 분명한데, 설마 일본인이 똥닦은 손을 그냥 저 수건으로 박박 문지르는 것은 아닐테고......

가만히 변기를 바라보니, 변기 위 물통으로 물이 계속 흐르고 있었고, 위에는 수도꼭지 같은 게 달려 있었다. 유레카! 물을 내리면 저 수도꼭지로 물이 나오면서, 손을 씻고 그 물이 흘러 내려가면서 물통을 채우는 거군. 에너지 절약. 하지만, 이미 때가 늦어 물통이 거진 차 가고 있었다. 결국, 물을 한 번 더 내리고 손을 씻고 나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식당의 화장실 사진을 찍지는 못했고 동일한 구조의 화장실 사진을 구글 검색으로 찾았다.


2. 2003년의 일본은 지방선거 중이었다. 이번에도 지방선거가 진행 중이었는데, 그중 눈길을 끈 것은 공산당 포스터였다. 쿠데타는 많았으나, 아래로부터의 혁명은커녕 그와 유사한 사건조차 없었던 나라에서 공산당의 전통이 무슨 의미일까 싶은 일종의 비아냥도 들었지만, 공산당조차 없는 나라에서 온 사람이 무슨 토를 달 수 있을까. 어찌 되었든 뚜렷하게 포스터에 박힌 '共産黨'은 한자 그 자체로의 의미대로 인상적이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2003년 철학의 길을 걷다가 본 공산당의 선거 포스터. 이라크전 반대 문구가 또렷하다.


숙소에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 교토에서 일본 공산당이 얻는 지지가 자민당을 뛰어넘거나 거의 같을 것이라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아마 전국적으로도 공산당의 세력이 가장 큰 곳 중의 하나일 수 있다나. 왜 그러냐니, 자기도 정확히 말할 수는 없고 대충 교토의 기질이 그렇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라고 설명해주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2006년 포스터. 오사카에서 잠시 만났던 casaubon형의 앨범에서 불펌. 나와 형은 공산당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예쁜 얼굴이라 당선 되야 한다는 합의를 봤다.


돌아와서 읽은 김윤식의 '청춘의 감각, 조국의 사상'에도 일본인의 글을 인용하며 비슷한 의미로 딱히 꼬집어 설명할 수 없는 교토인의 반골(?) 혹은 저항(?) 기질이 언급되어 있었다.

지금도 교토인은 교토라 부르지 않고 기요라 하거니와, 호상과 절 중심으로 발달한 이 중세 헤이안조의 자존심을 지닌 교토는 지층이 함몰된 호수 밑바닥(호저부지)이어서 여름엔 찌듯이 덥고 겨울엔 몹시 춥다. 교토의 역사 속에는 이러한 지리적 조건과 함께 정치적 조건도 은밀히 배어 있음이 드러난다. 교토는 전제 지배자에 의해 쓰라린 경험을 했다. 1568년 노부나가가 입경했을 때 그전의 지배자와는 썩 달랐다. 새로운 기대감과 공포감이 교차했는데, 두번째 입경 때 그는 그의 출영을 위해 사람들을 동원하도록 강요했으며, 도시를 지켜주는 대가를 요구했고 이를 거부한 귀족층을 토벌했다. 그 다음 장군으로 등장한 히데요시는 탄압적으로 나오지 않고 호상들과 제휴하여 정치에 임하였고, 그로인해 봉건 도시로서의 권위와 체모를 유지시켰다. 히데요시는 이 도시의 자체를 풍성하게 만들었으나, 그 뒤를 이은 이에야스는 교토를 버리고 에도로 막부를 옮김으로써 교토는 정치의 중심부에서 멀어져갔는데, 그로부터 메이지유신까지 천황을 중심부에 둔 기품과 세련성을 지닌 도시로 남았던 것이다.


역사적 적자가 정치적 서자로 격하된 것에 대한 반발과 상인의 자존심이 얽힌 것이 교토의 저항 기질이라고 보면 될까?

3. 대중목욕탕 센토(錢湯)

오사카의 비지니스 호텔은 싼 가격 답게, 호텔 전체에 단 하나의 샤워시설만 있었다. 번잡한 아침 시간에 먼저 사용할 수 있게 해준 친구가 있었는데, 내심 오래 기다리지 않고 쓸 수 있어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왠걸 여자친구와 같이 샤워하기 위해 나에게 자리를 양보한 것이었다.

샤워 부스의 크기로 보건대 무흣한 상상을 실천했다기 보다, 여자 친구가 사용할 수 있게 대신 기다렸거나, 기다리는 시간을 줄인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지만, 고마웠던 마음은 싹 사라졌다.

교토의 숙소는 자체적인 목욕시설이 없어 주변의 센토를 이용해야 했다. 이 기회 아니면 언제 가보겠냐 싶어 열심히 다녔다. 단체로 등산 다녀온 후 목욕하러 갈때 외에는 대중목욕탕을 갈 일이 없고, 그 흔한 찜질방조차 안가니, 한국에서도 자주 하지 않는 경험이었다.

자주 가던 센토는 숙소에서 가깝기도 했지만, 입구에 걸려있는 큼지막한 츠바키 포스터의 미녀들이 반가워서라도 찾게되는 곳이었다.

소문에서처럼 남탕과 여탕을 다 관찰할 수 있는 주인장의 자리가 있지는 않았다. 입구에서 돈만 받을 뿐이었다. 일본 목욕탕은 한국 목욕탕과 흡사한 구조였다. 천장이 뚫려 있어 여탕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다 들리는 게 처음에는 야릇한 자극이었지만, 이런 종류의 모든 자극이 그렇듯 시간이 지날 수록 익숙해졌다.

탕의 크기가 한국의 대중목욕탕보다 훨씬 작았고, 서서 사용할 수 있는 샤워시설이 없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랄까. 사우나는 한국보다 좀 더 뜨거웠고. 전기탕이라고 물속에 전류가 흐르는 탕이 있었다. 겁이 나서 가슴까지는 못 집어넣고 다리만 넣고있다 나왔지만, 저릿저릿한 느낌이 좋아서 매일 애용했다. 맥주 한 잔 마시고 들어가보고 싶었지만, 그럴 용기는 없었다.

p.s. 위키에서 검색(영문)해 보니, 외국인을 받지 않는 센토가 있어 인종차별로 고소를 당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일본의 인종차별에 대한 단면을 엿볼 수 있는 사건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어떨까? 불을 보듯 뻔하지 않을까 싶다. 아시안계가 힘이 없으니 고소가 안 일어난 것 뿐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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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에 왜 또 가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우습지만 논문쓰러 간다고 했다. 농담으로만 한 말은 아니라 맥북과 논문 다섯 편, 얇은 책 한권을 가방에 넣었다.

꼭 그런 의무감 때문은 아니었고, 밤마다 벌어지던 술판과 사람들과 이야기 하는 것도 슬 지겨워지고 교토에 온지도 2, 3일쯤 지나고 나니 글을 좀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점심 무렵이면 아무도 없는 숙소에서 글을 읽는 것은 가능했지만, 쓰는 것은 힘들었다. 교토대나 교토 국제회관이 생각났지만, 기왕이면 색다른 장소가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교토에 산 사람도 아닌데 학교가 아니면서 글을 쓸 만큼 여유로우면서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을 어떻게 쉽게 찾을 수 있을까? 교외의 절에 가면 될 듯 싶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실소를 자아낼만한 데, 절을 찾으려고 가이드북을 뒤졌다. 관광지에 가서 논문을 쓰겠다니 참 나 원.

그렇게 찾은 곳이 오하라(大原)였다. 교토에서 한 시간 정도 거리면 사람이 많지 않을 성 싶었다. 단풍철이면 사람으로 가득찬다는 말의 의미를 못 봤는지, 아니면 애써 무시했는지 모르겠다. 교토역 버스 정류장에서 17번인가 18번인가 버스를 탔다. 교토시영지하철 국제회관역에서도 버스가 서길래, 내릴까 잠시 고민했다. 그래도 기왕 나선 거 가봐야되지 않겠나 싶어, 계속 앉아 있었다.

심심하기도 했고, 내릴 곳을 확인하기 위해 물어볼 사람이 없을까 싶어 차내에서 두리번 두리번거렸는데, 반대편 창가에 앉아있는 예쁜 아가씨가 눈에 들어왔다. 다시 한 번 일본어를 배워둘 걸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안내방송에서 오하라라는 말이 들렸고, 친절하게도 차내 전광판에는 OHARA라는 알파벳까지 떴다. 순간 아차 싶었다. 여기 꽤 유명한 관광지구나. 말이라도 붙이지 않고 내리면 아쉬움이 될 것 같아, 여기가 오하라 맞냐고 영어로 물어봤다. 놀라지 않고 친절히 영어로 답해주길래, 오히려 내가 놀랐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오하라 일대 지도. S라고 된 곳이 버스정류장일 듯 싶으며, 라이고잉 너머 산길을 따라가면 무음 폭포가 있다. 지도 출처: Jtour


버스 정류장에서 나와 길을 건너 팻말을 쫓아 리쯔가와(律川)천변을 올라가니 여느 관광지처럼 길 옆으로 카페, 식당, 상점이 늘어서 있다. 굳이 가이드북의 조언을 보지 않더라도, 봄이면 난리 벚꽃장이나 가을이면 단풍 만큼 인간 병풍이 펼쳐질 것이 분명해 보인다. 물에 담은 오이와 일본식 짱아찌를 파는 가게가 있었는데, 마실 물이 충분했던 터라 오이를 먹어볼 생각이 들지 않았다. 게다가 좀 짜 보였다.

오이로 목을 축이는 것 보다는 밥을 먹는 일이 급선무였다. 점심때가 약간 지나서였을까, 식당에서 밥먹는 사람들이 안보였다. 아직 일본에서는 관광지 앞 식당이라고 해도 황당할 정도로 맛없는 식사를 먹어본 적이 없어서 어느 집을 들어가던 최소한의 기본은 하겠거니 싶었지만, 1,000엔 이하로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는 가격을 보고 있으니 기본보다는 조금 나은 집에는 가야하지 않겠나 하는 욕심이 슬몃 들었다. 살짝살짝 이집 저집 기웃거리다가 여남은 명이 식사 중인 식당을 발견하고 들어갔다.

메뉴판을 보니 오하라메(おはらめ, 大原女) 벤또가 있다. 올라오며 大原女를 자주 봤는데, 버스에서 만난 아가씨도 있었겠다 혼자 생각에 한국의 XX 아가씨처럼 이 동네에 미인이 많나보다 싶어 오하라메 벤또를 주문했다. 맛은 그럭저럭. 굳이 따진다면 맛없다에 가까웠다. 소박하면 정갈한 맛이 있어야 하는 데, 소박하기만 했지 정갈한 맛은 아니었다. 그나마 맛없어져 가는 동치미를 사이다로 되살리는 얄팍한 수는 아니라 다행이었다. 그냥 무미한 동치미를 먹는 기분이었다.

돌아와서 찾아보니 오하라메는 상상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였다. 오래전 오하라는 가난한 마을이어서 젊은 처자들이 교토시내로 땔감행상을 나갔단다. 그래서 오하라메라는 말은 생활력 강하고 건강미 넘치는 여인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오하라에서는 오하라메 인형을 특산물;로 팔고, 해마다 5월이면 축제를 한다고 한다. 이름만 놓고본다면 점심 주문은 잘못한 셈이었다.

식당을 나와 계속 산을 향해 올라가다 적당히 왔다 싶은 느낌이 들었을 때 왼편으로 산젠인(三千院, 한국어로 읽는 한자 발음은 삼천원이다. 좀 싸보이는; 느낌. 그래서인지 팻말을 보고도 산젠인이 아니라고 생각하고는 길을 헤맸다는 여행자도 있단다.)과 호센인으로 가는 길이 있었다. 산젠인 입구에는 산젠인몬제키(三千院門跡)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몬제키는 황족들이 절에 재산을 기부하고 주지를 하는 사원이라고 한다. 산젠인은 5대 몬제키 사원 중의 하나이다. 伝教大師(767-822)가 창건했는 데 그 이후 32명의 주지가 황족이었다고 한다.

산젠인 입구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담장으로 둘러쳐져 덩그마니 현판만 내걸려 있는 것이 절이라기 보다는 사극에서나 본 지방 관아같다. 한국 절에서 친숙한 일주문, 대웅전, 그리고 뒷편이나 어디 구석진 곳의 삼신각이 일렬로 늘어선 가람 배치와는 전혀 다르니 일본 절은 일본 절이구나하는 느낌이 든다.

산젠인의 관람 코스는 입구부터, 갸쿠덴(客殿), 슈헤키엔, 신덴(寢殿), 오조 고쿠라쿠인(往生極樂院), 부동당, 관음당, 아지사이엔으로 이어진다. 산젠인의 멋은 건물과 불상 보다는 갸쿠덴과 신덴에서 바라보는 정원과 명상의 시간이었다.

갸쿠덴 툇마루의 붉은 방석에 앉아 이끼, 나무, 석탑이 어우러진 슈헤키엔을 보고 있으니 낚시만 들이지 않았다 뿐이지 세월을 낚는 강태공이 따로 없었다. 많지는 않았지만 적다고는 할 수 없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지나가고 있었다. 경내 분위기때문이기도 하지만 대개의 관광객들이 중년을 지난 사람들인 터라 조용하기는 했어도 글을 읽을 수 있는 분위기는 못 되었다. 사람들 때문이 아니라, 정원을 보고 있으려니 내면의 자신과 이야기하게 되지 다른 사람의 글이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갸쿠덴에서 본 슈헤키엔


두 번째 건물인 신덴은 천황이 이 곳을 방문했을 때 머무는 곳이라고 한다. 천황이 머무는 니지노마(무지개방)라는 방이 있고, 천황의 친족이나 천황이 죽었을 때 천도법회를 여는 곳이라고 한다.

건물 한켠에서는 산젠인의 아름다운 모습을 담은 사진전을 하고 있었다. 걸려있는 포스터로 봐서는 사진 작품 공모 중인 듯 싶었다. 잘 찍기도 잘 찍었지만 산젠인은 봄의 벚꽃, 여름의 보랏빛 수국, 가을의 붉은 단풍, 겨울의 눈 밭, 사계절과 모두 잘 어울리는 곳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사진 중에서도 가장 유명해 보이고, 눈에 띄는 경관은 신덴에서 바라보는 오조 고쿠라쿠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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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 삽입 이미지신덴에서 바라본 오조 고쿠라쿠인


오조 고쿠라쿠인, 우리말 식 한자 발음으로는 왕생극락원. 986년 헤이안조에 건축된 건물로서, 일본 국보인 아미타 삼존불상이 안치되어 있다. 일본의 금불상에는 흥미가 없고, 이끼낀 정원을 거니는 것이 더 좋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부동당으로 가는 길. 대나무에서 나오는 물은 금색수라 한다. 저 물을 마시면 무병장수, 행복, 뭐 이런 것들이 온다고 적힌 팻말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돌아와서 산젠인을 검색해보니, 다음과 같은 설명이 나왔다. "신덴은 새로 지은 건물이라 그 자체로는 볼 것이 별로 없지만 이곳 마루에 걸터앉아 보는 풍경은 아름답다. 삼나무와 이끼로 만들어진 정원과 거기에 서있는 오조 고쿠라쿠인(往生極樂院) 건물이 잘 어우러져 보는 것 자체를 명상(瞑想)이 되게 한다. 이것이 오하라에서 만나는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 될 가능성이 많으니 잠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숨을 고르자."

신덴의 마루에서 보낸 한 시간여는 분명 오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그것은 비단 풍경이 좋아서였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녀를 만났기 때문이었다.

식상한 이야기지만 서른이 넘으면 가슴 떨림이 사라지면서 편안함과 아쉬움을 느끼게 된다고 하는데, 물리적 나이와 관계 없이 20대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길고긴 길었던 연애가 남긴 것은 내가 다시 한번 여자를 보고 가슴이 떨릴까 하는 의문이었다. 이제는 약간의 매너와 노회함이 유일한 무기이고, 솔직하게 타오르는 애정으로 돌진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연애 감정을 다시 느끼지 못하지 않을까라는 두려움이었을 뿐만 아니라, 아름다움을 다시 느끼지 못하지 않을까라는 두려움이었다. 학교에 개나리와 진달래가 피는 지 그녀와 연애를 하며 알게 되었고, 아름답다는 느낌을 그때 처음 가졌다. 올해 봄에도 개나리와 진달래가 폈지만, 폈다는 사실만 눈에 들어올 뿐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환상은 사라지고 현실만 남아있는 황량한 세계만이 앞으로 펼쳐질 것 같았다.

하룻밤의 쾌락을 위한 감언이설로써, 상대도 대충은 짐작하겠지만 같은 효능이라면 당의정 정로환이 먹기 편한법이니까, 아름다움을 이야기 할 수 있겠지만, 정말 아름답다는 감정을 갖고 그것을 입에 올릴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은 예뻤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옆 모습은 처마 밑으로 살짝 쏟아지는 햇살, 여름의 초록빛 이끼, 갈색 나무 건물이 자아내는 분위기와 완벽하게 어울렸다. 그녀를 보며 내 가슴은 다시 뛰었다.

그것은 다시 찾은 아름다움이었다.

<오하라 여행에 참고할만한 홈페이지>
Jtour의 오하라 소개.
오하라 및 주요 관광지 소개, 일정 예시 등 관광 정보('혼자 여행을 즐기는 젊은 여성들에게 인기 있는 곳으로 이곳에서 기념촬영을 하는 젊은 여성들의 모습을 쉽게 만날 수 있다.'는 독특한 설명이 있다.)

오하라에 다녀오신 비누님의 여행기.
글도 재치있게 쓰시고, 사진을 많이 찍어오셔서 보기 좋았다.(링크를 허락해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산젠인 홈페이지(일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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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에 세운 '스프링'을 놓고 이러쿵 저러쿵 말이 많나 보다. 작년에 클래스 올덴버그가 조형물 설계자로 결정된 이후 부터 그런 말들은 계속 나왔다. 파이낸스 센터를 몇 번 지나가며 보기는 봤는데 특별한 인상이 남질 않았다. 마치 그의 빨래집게를 알고 있었지만 필라델피아에서 봤는지 안봤는지 긴가민가 싶은 것처럼. 뭔가 쌩뚱맞은 녀석을 보기는 한 기억이 있긴 한데.

I.M. 페이가 루브르에 세운 유리 피라미드처럼 시간이 지날 수록 평이 좋아지거나, 모방의 대상(이를테면 뉴욕 5th Ave.의 애플 스토어처럼)이 될 수 있을 지 모르겠다. I.M.페이의 그랑 루브르 유리 피라미드는 옆에서 보면 어색하지만, 루브르 궁 정면에서 보면 썩 어울리는 편이고, 보면 볼 수록 마음에 든다.

교토 근방에 I.M.페이가 설계한 미호 박물관(MIHO MUSEUM)이 있다.

JR 교토역에서, 비와코센(琵琶湖線)을 15분쯤 타고 이시야마역(石山駅)에 내린 후(2006년 여름 기준 260엔), 버스 정류장 쪽 출구(남쪽)로 나와 3번 승강장에서 미호 박물관 행 테이산(帝産) 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내린다. 버스는 한 시간에 한대 꼴로 다니고, 승강장에 한국어를 포함한 각국 언어로 짧은 안내물이 붙어 있다. 편도 요금 800엔. 소요시간은 45~50분 정도. 종점과 기점을 연결하는 것이니 마음 편하게 한 숨 푹 자도 되고, 가는 길의 주변 경관을 봐도 된다. 산골로 들어가는 주변 경관도 아름답다.

시가켄(滋賀県)의 시외버스는 뒤에서 타면서 번호표를 받는다. 기점에서 타면 1번 번호표, 그 다음 정류장은 2번 번호표 이런 식으로. 요금은 차에서 내리면서 내면 되고, 전면 유리창 위를 보면 자기가 탈 때 받은 번호가 보이고 그 밑에 요금이 표시된다.

주차장(이 근처에도 상당히 괜찮은 공원이 만들어져 있다)에서 올라가면 매표소가 나온다. 매표소에는 식당과 빵집이 있다. 유기농으로 키운 재료만으로 음식을 판다는 점을 강조했는데, 정말 유기농인지는 그런가 보다 믿을 뿐이고, 우동과 다꽝이 조미료 없이 만든 담담한 맛이라 괜찮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삶의 여유가 넘치지는 않지만, 적당하니 있는 그런, 예순은 훨씬 지났을 것 같은 노인들만 식사를 들고 있었다.

나와서 찬찬히 올라가는 길에 만난 사람들도 모두 곱게 늙은 노인들 뿐이었다. 간혹 보이는 젊은이들은 소풍나온 연인들이었고. 홀로 다니는 사람은 나 뿐이었다. 하지만, 산에서 떨어져 죽어야겠다는 심정이 들만큼 외롭지는 않았다. 박물관 전경을 두고 죽기에는, 경관이 너무 아름다웠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식당, 빵집, 기념품 판매소, 화장실 등이 있는 매표소. 사진 왼편과 오른편에 보이는 잔디밭에는 탁자와 의자가 있어서, 매표소 안의 에어컨 바람에 뼈가 시릴 정도로 추운 사람에게는, 나와서 책을 보는 것이 더 좋을 수도 있겠다.


입장료는 성인 1,000엔, 학생 800엔. 교토 시내 왠만한 절 입장료가 500엔이고, 박물관이 1,000엔인 것에 비하면 비싼 것은 아니지만, 중앙박물관 입장료가 2,000원인 우리 기준으로는 싼 값은 아니다. 사설 미술관인 리움이 10,000원이고 특별전도 그 정도인 것에 비하면 비싼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학생증을 들고 가서 200엔 할인 받은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아마 그것은 작년에 체스키 크룸로프의 에곤 쉴레 미술관에 들어갈 때 학생 확인이 안되니 할인 해줄 수 없다며 직원과 실랑이를 한 기억때문일 것이다. 국제학생증을 별도로 만들어가지 않았는데, 동행했던 사람의 학생증에는 university가 찍혀 있어 학생이라는 게 확인이 되지만, 내 학생증에는 학생임을 확인할 수 있는 문구, 즉 알파벳으로 적힌 것이 하나도 없으니 학생할인을 해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저 사람보다 어려 보이는 내가 학생이 아닐리 있겠느냐는 이유로 우기고 있으니, 귀찮았는지 학생요금으로 들여보내주기는 했지만 기분은 찜찜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돈 몇 푼의 문제가 아니라 학교의 자존심;;이자 내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던 것 같다. 그는 학부 시절 다니던 국립대 학생증을 내밀었고, 나는 보통 사용하던 내 학생증을 보여주었으니까. 재미있었던 것은 그 미술관은 보물찾기 놀이 하듯 에곤 실레의 작품을 꽁꽁 숨겨 놨는데 그렇게 보고 싶어했던 그 형은 보지 못하고 나만 봤다는 것이다.

여담인데 에곤 실레는 미성년 강간 혐의로 체스키 크룸로프에서 1년만에 추방되었다. 그는 그 동네를 꽤 마음에 들어해서, 마을을 대상으로한 몇 개의 작품을 남겼다. 하지만 자신을 추방한 마을에 자발적으로 작품을 기증할리는 만무했을 테고, 사후에 워낙 유명해져서 소규모 미술관 차원에서 구입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체스키 크룸로프의 에곤 실레 미술관에는 드로잉 몇 점만 실레의 이름으로 걸려 있을 뿐이다.

미호 박물관에서도 처음에는 내 학생증을 보고 학교를 확인할 방도가 없다는 투의 표정을 지으며, 옆의 매표원에게 조언을 구했다. 작년 생각이 잠시 나서 1,000엔짜리를 꺼내 들으려니, 학생증을 가리키면서 어느 것이 학교 이름이냐고 물어왔다. 망설임없이 밑줄을 그어 알려주니, 그제서야 할인을 해주었다. 이후 다른 곳에서도 학생할인을 받을 일이 있었는데, 이 곳처럼 세세히 보지는 않고 그냥 학생증 같은 카드를 내나 안내나만 확인했다.

아무튼 I.M.페이는 미호 박물관을 일명 무릉도원이라고도 하는 도원경을 형상화하여 설계했다. 무릉도원 고사에서 어부가 복숭아 향기를 따라 강을 거슬러 올라가듯, 매표소에서 박물관 본관 까지는 약 2km 쯤 떨어져 있고, 이를 걸어가야 한다. 노약자를 위해서 골프 카트 모양의 전기 자동차가 다니는 데, 속도는 빠르지 않다. 천천히 뛰는 정도. 그러니 산책 삼아 걸어 올라가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어부는 작은 동굴을 지나 도원경에 이르게 되는 데, 그와 비슷하게 터널을 지나야 박물관에 이를 수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터널 입구. 이곳까지 오는 길도 주변 숲이 울창해서, 걷기 좋은 데다 마침 태풍이 지나가는 날이라 바람이 불어서 나뭇잎 소리 듣기가 좋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터널 내부. 금속성의 터널이, 도원경 고사의 동굴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지만, 이질감 없이 잘 어울리는 편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터널의 끝. 멀리 보이는 건물이 박물관 본관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터널을 나오면 마지막으로 다리를 건너야 박물관 본관에 이를 수 있는데, 다리 좌우로 펼쳐진 산이 아름답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박물관 입구


입구에 들어서서 정면을 바라보면, 햇빛이 유리창을 지나 부드럽게 쏟아지며 넓은 공간에 따뜻함을 뿌린다. 한눈에 들어오는 주변 경관이 아주 아름답다. 설계자의 의도대로 자연 속에 파묻힌 별천지 같은 공간이다. 매표소부터 길, 다리, 박물관 본관까지 금속과 유리라는 첨단 제품으로 만들어졌음에도, 위화감 없이, 산과 잘 어울렸다. 통나무, 토담집만 자연과 어울리는 것은 아니다. 물론 알루미늄 덩이가 항상 도시와 어울리는 것도 아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박물관에 들어서서 정면을 보이는 경관. 일본식 정원에서 영감을 받아 설계한 티가 역력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박물관 내부의 기하학적 골조. 기념품으로 파는 엽서에는 이 곳에 조명을 비추어 찍은 사진을 파는 데, 참 아름답다.


작은 규모에 비해, 고대 이집트(세상에 이집트 유물과 피카소 그림 없는 박물관은 없다지만), 고대 그리스(누군가의 정원에서 떼어온 프레스코화와 우물가의 모자이크는 볼만하다), 고대 로마, 남아시아, 중국, 이슬람 등 소장품의 범위는 넓은 편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간다라 양식의 불상. 자연적인 채광을 이용하여 미술품을 전시한 상징적인 사진이다. 햇살의 따스러운 느낌이 불상의 온화한 미소를 더욱 부드럽게 만든다. 출처: 미호 박물관 홈페이지


냉정하게 말해,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전시품 들 중 특별하거나 유명한 것은 없다. 박물관 자체가 소장품 보다 더 아름다운 작품이랄 수 있다.

건축을 좋아하는 사람, 근교에 당일치기 데이트하러 갈 수 있는 분위기의 여행지를 좋아하는 사람, 마음과 몸의 시간 모두 넉넉한 사람에게 적극 추천할 만한 곳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박물관 반대편 산에서 찍은 박물관 전경. 사진 상태가 안 좋은데, 팸플릿에 나온 사진에는 산안개가 살포시 퍼져 있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출처: 미호 박물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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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는 관광객 유치때문인지 불꽃놀이가 많아 졌지만, 예전에는 가뭄에 콩나듯 서울 올림픽인가 서울 아시안 게임인가의 폐막식처럼 특별한 날에나 볼 수 있는 행사였다. TV로 보았던 그 때의 불꽃놀이는 무척이나 유치하게 보였다.

많은 전세계인이 그러하듯 나도 일본 문화의 상당 부분을 만화에서 익혔는데, 열혈야구 만화를 가장한 청춘 애정 만화 H2를 보면 여름에는 갑자원 뿐만 아니라 하나비가 열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년전에 갔던 간사이 여행에서는 하나비 소식을 듣지 못했으니, 7월말부터 8월 중순이 하나비 시즌이 아닐까 싶다. 그 때 못 가본 것이 아쉬어 이번에는 꼭 가보고 싶었다. 하나비 날짜를 일일이 확인할 수는 없었고, 다만 론니 플래닛을 보니 매해 8월 8일에 교토 근처 오츠에서 하나비가 있는지, 그때 교토에 있다면 꼭 가보라고 소개되어 있었다.

하지만 막상 교토에 가서 보니 매일매일 일본 전역이 하나비였다. 일본에서는 보통 거리 판촉물로 포켓 휴지를 줘서 여행 내내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서도 유용하게 써먹었는데, 이번에는 여름이라 그랬는지 부채를 줬다. 거리에서 나눠준 판촉용 부채 중 하나는 아예 8월 한달 간사이 지방의 하나비 일정이 나와 있었다.

8월 5일 숙소에 짐을 풀고 빈둥 거리고 있었는데, 태국 출신인 켐이 저녁에 하나비 구경을 가잔다. 내가 알고 있었던 것은 8월 8일 오츠 하나비 뿐이라, 그게 날짜가 바뀐 거냐고 물어봤더니, 8월 5일 하나비는 오사카에서 한단다. 한낮에 땀 삐질거리며 오사카에서 교토로 넘어왔는데, 그날 밤 다시 오사카로 넘어가자니 좀 귀찮았다. 연신 갈지 안 갈지 잘 모르겠다고 그러니, 이 친구 결정타를 날린다. 자기가 도쿄에서 보고 왔는데, 불꽃놀이는 그냥 불꽃놀이고, 유카타 입고 오는 여자애들 구경하는 게 훨씬 재미있단다. 아, 그래? 그럼 가야지. *^^*

오사카 하나비의 공식 명칭은 헤이세이 요도가와 하나비 다이카이(平成淀川花火大會). 2005년에 30만명이 관람했다고 한다. 쏘아올리는 불꽃은 2만발. 교토 TIC에서 강변에 가까운 JR역을 소개해주었는데, 밥도 먹고 구경도 할 겸 JR 오사카 역에서 걸어가기로 했다. 천천히 사람들 따라서 북쪽으로 2~30분쯤 걸어가면 요도가와 강이 나온다. 가는 사람들이 많아서 시간이 좀 걸리지 평상시 같으면 걸어서도 20분 이내로 갈 수 있을 듯 싶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강변에 도착하면 돈을 내는 자리와 무료로 보는 자리로 편이 갈리고, 그 뒤로는 적당히 빈 자리 찾아서 앉으면 된다. 불꽃놀이 시작하기 1시간 전 쯤인 저녁 7시에 강변에 도착했는데, 강변의 절반쯤 그리고 강둑 가득 이미 사람들이 꽉꽉 들어차 있었다. 거나하게 피크닉 파티를 벌이고 있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앉았다. 안전용 막인지, 유료 관객과 무료 관객을 가르는 막인지 용도를 모르는 장막이 바로 앞에 쳐져 있어서, 불꽃이 낮게 뜨면 보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켐의 말대로 유카타 입고 여자들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핑크색 옷을 입은 귀여운 아가씨들이 많았는데, 옷이 무척 불편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물어보니 불편한 것은 둘째치고 옷이 덥단다. 그런데 사람보는 재미는 잠깐이고, 맥주나 음료수를 사왔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켐이 나름 핸섬하게 생기고 키도 커서 앞자리에 앉은 아가씨들 꼬셔서 맥주 얻어 먹자고 살짝살짝 부추겨 봤는데, 별로 생각이 없는 듯, 도쿄에서는 시부야 여자애들이 이쁘단 소리만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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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되어서 하나비는 시작하고. 아무 생각없이 입구에 가장 가깝다는 이유로 앉은 자리였는데, 바로 앞에서 불꽃이 터지기 시작했다. 터지는 높이도 장막에 가리지 않을 정도로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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켐의 말로는 도쿄의 하나비에선 12만발이 터졌는데, 좀 지루했단다. 하지만 오사카의 하나비는 속도감있게, 한편으로는 스펙타클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다채로운 문양의 불꽃송이들이 하늘을 갈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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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의 제왕에서 간달프가 만드는 펄펄 날아다니는 용 정도는 아니어도 하늘에 불꽃으로 꽃과 나비, 하트, 글씨 등을 쓰기도 하고, 폭포수처럼 쏟아지기도 하는 게 재미있고 신기하기도 했다. 불꽃 장인에 관한 만화를 읽은 적이 있는데, 매년 새로운 불꽃을 만들어서 사람들을 즐겁게 해줘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범죄를 저지르던가 그런 내용이었을 거다. 충분히 그럴만하겠다 싶었다. 매년 30만명이 모여서 즐기는 행사가 흔한 것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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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8일은 교토 근교의 미호 미술관을 보고 저녁에 오츠(大津)에서 하나비를 보는 것으로 일정을 잡았다. 그런데 오츠역에 도착하니 태풍으로 하나비를 11일로 연기한다는 공문이 붙어 있었다. 11일이 되기는 했는 데 전날 밤새 숙소에서 사람들과 얘기하느라 잠이 부족한 탓에 꼼짝하기가 싫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뒹굴거리고 있는데, 이번에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알렉스가 같이 시내에 나가잔다. 이 친구와 나가면 재미는 있겠지만 백발백중 밤새 폭음하겠다 싶어, 하나비보러 간다하고는 숙소를 나왔다.

오츠는 교토에서 JR을 타고 1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행정구역으로는 시가켄(滋賀縣)이다. 오츠시는 비와코(琵琶湖)로 더 유명한데, 비와코는 일본에서 가장 큰 호수이자 유명 휴양지다. 호수도 보고 시원한 바람도 쐴 겸, 기내용 담요, 벤또(도시락), 맥주, 과자, 잔뜩 사들고는 오츠역에 도착했다. 아뿔싸 오사카의 30만명 정도는 아니더라도 여기온 사람들 숫자도 만만치 않게 많았다. 영어 가이드북에 조차 나온 축제를 차분하게 즐길 생각을 한 게 잘못이었다.

간신히 자리를 잡고, 벤또를 꺼냈다. 교토역 이세탄 백화점의 벤또 전문점에서 골라온 녀석이었는데, 맛이 괜찮은 편이었다. 하지만, 옆자리에 앉은 가족들이 펼친 거대한 초밥 도시락에 비하면 수수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오츠는 장막이 없어서 물위로 바로 떨어지는 불꽃 송이들을 다 볼 수 있었다는 것과 불꽃이 호수의 양 끝에서 올라왔다는 것 정도의 차이를 제외하면 오사카나 오츠나 하나비는 비슷했다. 어쩌면 불꽃이 터졌을 때의 형상, 패턴, 진행 속도 등등 많은 차이가 났을지도 모른다. 유심히 보면 알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혼자 먹는 도시락의 쓸쓸함을 되새기는 순간, 하나비의 흥취는 사라졌다.

<오츠 하나비에서 찍은 동영상>

흩날리는 벚꽃의 미학처럼 순간성과 유미주의의 결합이 일본 미의 한 특성이 아닐까라고 생각했는데, 하나비도 같은 범주에 들어가지 않을까?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

열 아홉, 스물. 어떤 경계의 양쪽에 발을 걸친채, 어느 한 쪽에 몸을 던지지 못했다. 혁명과 변화를 이야기하는 학생들에게, 너희의 삶이 끊임없이 요동치는 것이 과연 좋기만 하겠느냐고 반문하던 선생의 말뜻을 그 당시에 느끼고 이미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열정과 환희는 삶의 원동력이 아니라, 장강의 흐름 속 파문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는 것 말이다. 뜨거운 가슴하나로 운명을 개척하겠다는 사람들, 우습게 보였다. 하얗게 타버린다는 사람들, 안쓰러워 보였다.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은 토끼나 느끼는 거라고 조소했다. 그리고 생각한 대로 살지 않고 사는 대로 생각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스물아홉, 서른. 십년이 지나고 나서 보니, 하얗게 타버린다고 재가 되어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고, 뜨거운 가슴이 적당히 식어서는 적당히 알아서 산다. 생각한 대로 살다가,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되면서 번쩍했던 과거를 훈장처럼 달고 다닌다. 늦되서 그런 건지, 어긋짱난 구석이 있어서인지, 이제 내 삶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찾아야 할지와 생각하는 대로 사는 것을 고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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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 중

'언제 겨울이 왔을까? 계절은 사람이 늙는 것처럼 서서히 쇠퇴해갔다. 하루하루의 변화는 눈에 띄지 않았지만, 어느새 겨울은 가혹한 현실로 자라잡았다. 처음에는 저녁에 기온이 좀 내려가는가 싶더니, 며칠 계속 비가오고, 대서양에서 온 바람이 제멋대로 불고, 습도가 높아지고, 나뭇잎이 떨어지고, 결국 섬머타임으로 당겼던 시간을 다시 늦추게 되었다. 그래도 이따금씩 유예의 순간들이 있었다. 외투 없이 집을 나서다 구름 한 점 없이 밝게 빛나는 하늘을 볼 수 있는 아침이 그런 때였다. 그러나 이런 아침은 이미 죽음을 선고받은 환자가 보여주는 거짓 회복 징후와 같았다.


12월이 되자 새로운 계절은 확고하게 뿌리를 내렸다. 거의 매일 불길한 느낌을 주는 강철빛 회색 하늘이 도시를 덮었다. 만테냐나 베로네제의 그림에 나오는 하늘 같았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의 배경이 될 만한 하늘이었다. 아니면 침대에서 종일 뭉그적대는 날의 배경이 되거나. 동네 공원은 황량하게 진창으로 뒤덮이고, 밤이면 빗물이 얼룩지는 가로등 불에 그 모습이 환하게 드러났다. 비가 억수로 퍼붓던 어느 날 저녁 공원 옆을 지나다가 지난 여름 더위가 한창일 때 땅에 드러누워 신발을 벗고 맨발로 풀잎을 쓰다듬던 기억이 났다. 그렇게 땅과 직접 접촉하자 왠지 마음도 자유롭고 느긋해지는 것 같았다. 여름은 실내와 실외 사이의 일반적인 장벽을 부수어, 나는 세상 속에서도 내 방에 있는 것 같은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공원은 다시 낯설어졌다. 쉴 새 없이 내리는 비로 풀밭은 금단의 영역이 되었다. 도시의 가로등에 오렌짓 빛으로 물드는 낮은 하늘 아래로 비에 젖은 검붉은 벽돌 건물들과 마주치자, 잠복해 있던 슬픔이, 행복을 얻거나 이해를 받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는 회의가 물 만난 물고기처럼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

이 팸플릿을 만든 사람들은 어두운 직관을 통해, 야자나무, 맑은 하늘, 하얀 해변을 보여주는 노출 과다의 사진들, 지성을 모욕하고 자유의지를 무너뜨리는 힘을 지닌 이런 사진들에 사람들이 쉽게 현혹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삶의 다른 영역에서라면 회의와 신중을 자랑할만 한 사람들도 이런 요소들과 마주치면 원시적인 순수와 낙관의 상태로 돌아가고 말았다. 실제로 사람들은 이런 팸플릿을 보고도 강한 갈망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사람의 계획이 [그리고 심지어 인생 전체도] 아주 단순하고 어설픈 행복의 이미지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 감동적이면서도 진부한 예였다. 또 가계에 파탄을 일으킬 정도로 돈이 많이 드는 긴 여행이 열대의 바람에 살짝 기울어진 야자나무 사진 한 장으로 시작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이기도 했다.

나는 바베이도스 섬으로 떠나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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