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류 관광엽서사진관

교토에 왜 또 가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우습지만 논문쓰러 간다고 했다. 농담으로만 한 말은 아니라 맥북과 논문 다섯 편, 얇은 책 한권을 가방에 넣었다.

꼭 그런 의무감 때문은 아니었고, 밤마다 벌어지던 술판과 사람들과 이야기 하는 것도 슬 지겨워지고 교토에 온지도 2, 3일쯤 지나고 나니 글을 좀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점심 무렵이면 아무도 없는 숙소에서 글을 읽는 것은 가능했지만, 쓰는 것은 힘들었다. 교토대나 교토 국제회관이 생각났지만, 기왕이면 색다른 장소가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교토에 산 사람도 아닌데 학교가 아니면서 글을 쓸 만큼 여유로우면서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을 어떻게 쉽게 찾을 수 있을까? 교외의 절에 가면 될 듯 싶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실소를 자아낼만한 데, 절을 찾으려고 가이드북을 뒤졌다. 관광지에 가서 논문을 쓰겠다니 참 나 원.

그렇게 찾은 곳이 오하라(大原)였다. 교토에서 한 시간 정도 거리면 사람이 많지 않을 성 싶었다. 단풍철이면 사람으로 가득찬다는 말의 의미를 못 봤는지, 아니면 애써 무시했는지 모르겠다. 교토역 버스 정류장에서 17번인가 18번인가 버스를 탔다. 교토시영지하철 국제회관역에서도 버스가 서길래, 내릴까 잠시 고민했다. 그래도 기왕 나선 거 가봐야되지 않겠나 싶어, 계속 앉아 있었다.

심심하기도 했고, 내릴 곳을 확인하기 위해 물어볼 사람이 없을까 싶어 차내에서 두리번 두리번거렸는데, 반대편 창가에 앉아있는 예쁜 아가씨가 눈에 들어왔다. 다시 한 번 일본어를 배워둘 걸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안내방송에서 오하라라는 말이 들렸고, 친절하게도 차내 전광판에는 OHARA라는 알파벳까지 떴다. 순간 아차 싶었다. 여기 꽤 유명한 관광지구나. 말이라도 붙이지 않고 내리면 아쉬움이 될 것 같아, 여기가 오하라 맞냐고 영어로 물어봤다. 놀라지 않고 친절히 영어로 답해주길래, 오히려 내가 놀랐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오하라 일대 지도. S라고 된 곳이 버스정류장일 듯 싶으며, 라이고잉 너머 산길을 따라가면 무음 폭포가 있다. 지도 출처: Jtour


버스 정류장에서 나와 길을 건너 팻말을 쫓아 리쯔가와(律川)천변을 올라가니 여느 관광지처럼 길 옆으로 카페, 식당, 상점이 늘어서 있다. 굳이 가이드북의 조언을 보지 않더라도, 봄이면 난리 벚꽃장이나 가을이면 단풍 만큼 인간 병풍이 펼쳐질 것이 분명해 보인다. 물에 담은 오이와 일본식 짱아찌를 파는 가게가 있었는데, 마실 물이 충분했던 터라 오이를 먹어볼 생각이 들지 않았다. 게다가 좀 짜 보였다.

오이로 목을 축이는 것 보다는 밥을 먹는 일이 급선무였다. 점심때가 약간 지나서였을까, 식당에서 밥먹는 사람들이 안보였다. 아직 일본에서는 관광지 앞 식당이라고 해도 황당할 정도로 맛없는 식사를 먹어본 적이 없어서 어느 집을 들어가던 최소한의 기본은 하겠거니 싶었지만, 1,000엔 이하로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는 가격을 보고 있으니 기본보다는 조금 나은 집에는 가야하지 않겠나 하는 욕심이 슬몃 들었다. 살짝살짝 이집 저집 기웃거리다가 여남은 명이 식사 중인 식당을 발견하고 들어갔다.

메뉴판을 보니 오하라메(おはらめ, 大原女) 벤또가 있다. 올라오며 大原女를 자주 봤는데, 버스에서 만난 아가씨도 있었겠다 혼자 생각에 한국의 XX 아가씨처럼 이 동네에 미인이 많나보다 싶어 오하라메 벤또를 주문했다. 맛은 그럭저럭. 굳이 따진다면 맛없다에 가까웠다. 소박하면 정갈한 맛이 있어야 하는 데, 소박하기만 했지 정갈한 맛은 아니었다. 그나마 맛없어져 가는 동치미를 사이다로 되살리는 얄팍한 수는 아니라 다행이었다. 그냥 무미한 동치미를 먹는 기분이었다.

돌아와서 찾아보니 오하라메는 상상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였다. 오래전 오하라는 가난한 마을이어서 젊은 처자들이 교토시내로 땔감행상을 나갔단다. 그래서 오하라메라는 말은 생활력 강하고 건강미 넘치는 여인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오하라에서는 오하라메 인형을 특산물;로 팔고, 해마다 5월이면 축제를 한다고 한다. 이름만 놓고본다면 점심 주문은 잘못한 셈이었다.

식당을 나와 계속 산을 향해 올라가다 적당히 왔다 싶은 느낌이 들었을 때 왼편으로 산젠인(三千院, 한국어로 읽는 한자 발음은 삼천원이다. 좀 싸보이는; 느낌. 그래서인지 팻말을 보고도 산젠인이 아니라고 생각하고는 길을 헤맸다는 여행자도 있단다.)과 호센인으로 가는 길이 있었다. 산젠인 입구에는 산젠인몬제키(三千院門跡)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몬제키는 황족들이 절에 재산을 기부하고 주지를 하는 사원이라고 한다. 산젠인은 5대 몬제키 사원 중의 하나이다. 伝教大師(767-822)가 창건했는 데 그 이후 32명의 주지가 황족이었다고 한다.

산젠인 입구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담장으로 둘러쳐져 덩그마니 현판만 내걸려 있는 것이 절이라기 보다는 사극에서나 본 지방 관아같다. 한국 절에서 친숙한 일주문, 대웅전, 그리고 뒷편이나 어디 구석진 곳의 삼신각이 일렬로 늘어선 가람 배치와는 전혀 다르니 일본 절은 일본 절이구나하는 느낌이 든다.

산젠인의 관람 코스는 입구부터, 갸쿠덴(客殿), 슈헤키엔, 신덴(寢殿), 오조 고쿠라쿠인(往生極樂院), 부동당, 관음당, 아지사이엔으로 이어진다. 산젠인의 멋은 건물과 불상 보다는 갸쿠덴과 신덴에서 바라보는 정원과 명상의 시간이었다.

갸쿠덴 툇마루의 붉은 방석에 앉아 이끼, 나무, 석탑이 어우러진 슈헤키엔을 보고 있으니 낚시만 들이지 않았다 뿐이지 세월을 낚는 강태공이 따로 없었다. 많지는 않았지만 적다고는 할 수 없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지나가고 있었다. 경내 분위기때문이기도 하지만 대개의 관광객들이 중년을 지난 사람들인 터라 조용하기는 했어도 글을 읽을 수 있는 분위기는 못 되었다. 사람들 때문이 아니라, 정원을 보고 있으려니 내면의 자신과 이야기하게 되지 다른 사람의 글이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갸쿠덴에서 본 슈헤키엔


두 번째 건물인 신덴은 천황이 이 곳을 방문했을 때 머무는 곳이라고 한다. 천황이 머무는 니지노마(무지개방)라는 방이 있고, 천황의 친족이나 천황이 죽었을 때 천도법회를 여는 곳이라고 한다.

건물 한켠에서는 산젠인의 아름다운 모습을 담은 사진전을 하고 있었다. 걸려있는 포스터로 봐서는 사진 작품 공모 중인 듯 싶었다. 잘 찍기도 잘 찍었지만 산젠인은 봄의 벚꽃, 여름의 보랏빛 수국, 가을의 붉은 단풍, 겨울의 눈 밭, 사계절과 모두 잘 어울리는 곳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사진 중에서도 가장 유명해 보이고, 눈에 띄는 경관은 신덴에서 바라보는 오조 고쿠라쿠인이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신덴에서 바라본 오조 고쿠라쿠인


오조 고쿠라쿠인, 우리말 식 한자 발음으로는 왕생극락원. 986년 헤이안조에 건축된 건물로서, 일본 국보인 아미타 삼존불상이 안치되어 있다. 일본의 금불상에는 흥미가 없고, 이끼낀 정원을 거니는 것이 더 좋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부동당으로 가는 길. 대나무에서 나오는 물은 금색수라 한다. 저 물을 마시면 무병장수, 행복, 뭐 이런 것들이 온다고 적힌 팻말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돌아와서 산젠인을 검색해보니, 다음과 같은 설명이 나왔다. "신덴은 새로 지은 건물이라 그 자체로는 볼 것이 별로 없지만 이곳 마루에 걸터앉아 보는 풍경은 아름답다. 삼나무와 이끼로 만들어진 정원과 거기에 서있는 오조 고쿠라쿠인(往生極樂院) 건물이 잘 어우러져 보는 것 자체를 명상(瞑想)이 되게 한다. 이것이 오하라에서 만나는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 될 가능성이 많으니 잠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숨을 고르자."

신덴의 마루에서 보낸 한 시간여는 분명 오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그것은 비단 풍경이 좋아서였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녀를 만났기 때문이었다.

식상한 이야기지만 서른이 넘으면 가슴 떨림이 사라지면서 편안함과 아쉬움을 느끼게 된다고 하는데, 물리적 나이와 관계 없이 20대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길고긴 길었던 연애가 남긴 것은 내가 다시 한번 여자를 보고 가슴이 떨릴까 하는 의문이었다. 이제는 약간의 매너와 노회함이 유일한 무기이고, 솔직하게 타오르는 애정으로 돌진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연애 감정을 다시 느끼지 못하지 않을까라는 두려움이었을 뿐만 아니라, 아름다움을 다시 느끼지 못하지 않을까라는 두려움이었다. 학교에 개나리와 진달래가 피는 지 그녀와 연애를 하며 알게 되었고, 아름답다는 느낌을 그때 처음 가졌다. 올해 봄에도 개나리와 진달래가 폈지만, 폈다는 사실만 눈에 들어올 뿐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환상은 사라지고 현실만 남아있는 황량한 세계만이 앞으로 펼쳐질 것 같았다.

하룻밤의 쾌락을 위한 감언이설로써, 상대도 대충은 짐작하겠지만 같은 효능이라면 당의정 정로환이 먹기 편한법이니까, 아름다움을 이야기 할 수 있겠지만, 정말 아름답다는 감정을 갖고 그것을 입에 올릴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은 예뻤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옆 모습은 처마 밑으로 살짝 쏟아지는 햇살, 여름의 초록빛 이끼, 갈색 나무 건물이 자아내는 분위기와 완벽하게 어울렸다. 그녀를 보며 내 가슴은 다시 뛰었다.

그것은 다시 찾은 아름다움이었다.

<오하라 여행에 참고할만한 홈페이지>
Jtour의 오하라 소개.
오하라 및 주요 관광지 소개, 일정 예시 등 관광 정보('혼자 여행을 즐기는 젊은 여성들에게 인기 있는 곳으로 이곳에서 기념촬영을 하는 젊은 여성들의 모습을 쉽게 만날 수 있다.'는 독특한 설명이 있다.)

오하라에 다녀오신 비누님의 여행기.
글도 재치있게 쓰시고, 사진을 많이 찍어오셔서 보기 좋았다.(링크를 허락해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산젠인 홈페이지(일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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