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류 관광엽서사진관

최근에는 관광객 유치때문인지 불꽃놀이가 많아 졌지만, 예전에는 가뭄에 콩나듯 서울 올림픽인가 서울 아시안 게임인가의 폐막식처럼 특별한 날에나 볼 수 있는 행사였다. TV로 보았던 그 때의 불꽃놀이는 무척이나 유치하게 보였다.

많은 전세계인이 그러하듯 나도 일본 문화의 상당 부분을 만화에서 익혔는데, 열혈야구 만화를 가장한 청춘 애정 만화 H2를 보면 여름에는 갑자원 뿐만 아니라 하나비가 열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년전에 갔던 간사이 여행에서는 하나비 소식을 듣지 못했으니, 7월말부터 8월 중순이 하나비 시즌이 아닐까 싶다. 그 때 못 가본 것이 아쉬어 이번에는 꼭 가보고 싶었다. 하나비 날짜를 일일이 확인할 수는 없었고, 다만 론니 플래닛을 보니 매해 8월 8일에 교토 근처 오츠에서 하나비가 있는지, 그때 교토에 있다면 꼭 가보라고 소개되어 있었다.

하지만 막상 교토에 가서 보니 매일매일 일본 전역이 하나비였다. 일본에서는 보통 거리 판촉물로 포켓 휴지를 줘서 여행 내내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서도 유용하게 써먹었는데, 이번에는 여름이라 그랬는지 부채를 줬다. 거리에서 나눠준 판촉용 부채 중 하나는 아예 8월 한달 간사이 지방의 하나비 일정이 나와 있었다.

8월 5일 숙소에 짐을 풀고 빈둥 거리고 있었는데, 태국 출신인 켐이 저녁에 하나비 구경을 가잔다. 내가 알고 있었던 것은 8월 8일 오츠 하나비 뿐이라, 그게 날짜가 바뀐 거냐고 물어봤더니, 8월 5일 하나비는 오사카에서 한단다. 한낮에 땀 삐질거리며 오사카에서 교토로 넘어왔는데, 그날 밤 다시 오사카로 넘어가자니 좀 귀찮았다. 연신 갈지 안 갈지 잘 모르겠다고 그러니, 이 친구 결정타를 날린다. 자기가 도쿄에서 보고 왔는데, 불꽃놀이는 그냥 불꽃놀이고, 유카타 입고 오는 여자애들 구경하는 게 훨씬 재미있단다. 아, 그래? 그럼 가야지. *^^*

오사카 하나비의 공식 명칭은 헤이세이 요도가와 하나비 다이카이(平成淀川花火大會). 2005년에 30만명이 관람했다고 한다. 쏘아올리는 불꽃은 2만발. 교토 TIC에서 강변에 가까운 JR역을 소개해주었는데, 밥도 먹고 구경도 할 겸 JR 오사카 역에서 걸어가기로 했다. 천천히 사람들 따라서 북쪽으로 2~30분쯤 걸어가면 요도가와 강이 나온다. 가는 사람들이 많아서 시간이 좀 걸리지 평상시 같으면 걸어서도 20분 이내로 갈 수 있을 듯 싶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강변에 도착하면 돈을 내는 자리와 무료로 보는 자리로 편이 갈리고, 그 뒤로는 적당히 빈 자리 찾아서 앉으면 된다. 불꽃놀이 시작하기 1시간 전 쯤인 저녁 7시에 강변에 도착했는데, 강변의 절반쯤 그리고 강둑 가득 이미 사람들이 꽉꽉 들어차 있었다. 거나하게 피크닉 파티를 벌이고 있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앉았다. 안전용 막인지, 유료 관객과 무료 관객을 가르는 막인지 용도를 모르는 장막이 바로 앞에 쳐져 있어서, 불꽃이 낮게 뜨면 보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켐의 말대로 유카타 입고 여자들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핑크색 옷을 입은 귀여운 아가씨들이 많았는데, 옷이 무척 불편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물어보니 불편한 것은 둘째치고 옷이 덥단다. 그런데 사람보는 재미는 잠깐이고, 맥주나 음료수를 사왔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켐이 나름 핸섬하게 생기고 키도 커서 앞자리에 앉은 아가씨들 꼬셔서 맥주 얻어 먹자고 살짝살짝 부추겨 봤는데, 별로 생각이 없는 듯, 도쿄에서는 시부야 여자애들이 이쁘단 소리만 계속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시간이 되어서 하나비는 시작하고. 아무 생각없이 입구에 가장 가깝다는 이유로 앉은 자리였는데, 바로 앞에서 불꽃이 터지기 시작했다. 터지는 높이도 장막에 가리지 않을 정도로 높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켐의 말로는 도쿄의 하나비에선 12만발이 터졌는데, 좀 지루했단다. 하지만 오사카의 하나비는 속도감있게, 한편으로는 스펙타클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다채로운 문양의 불꽃송이들이 하늘을 갈랐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반지의 제왕에서 간달프가 만드는 펄펄 날아다니는 용 정도는 아니어도 하늘에 불꽃으로 꽃과 나비, 하트, 글씨 등을 쓰기도 하고, 폭포수처럼 쏟아지기도 하는 게 재미있고 신기하기도 했다. 불꽃 장인에 관한 만화를 읽은 적이 있는데, 매년 새로운 불꽃을 만들어서 사람들을 즐겁게 해줘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범죄를 저지르던가 그런 내용이었을 거다. 충분히 그럴만하겠다 싶었다. 매년 30만명이 모여서 즐기는 행사가 흔한 것은 아니니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


8월 8일은 교토 근교의 미호 미술관을 보고 저녁에 오츠(大津)에서 하나비를 보는 것으로 일정을 잡았다. 그런데 오츠역에 도착하니 태풍으로 하나비를 11일로 연기한다는 공문이 붙어 있었다. 11일이 되기는 했는 데 전날 밤새 숙소에서 사람들과 얘기하느라 잠이 부족한 탓에 꼼짝하기가 싫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뒹굴거리고 있는데, 이번에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알렉스가 같이 시내에 나가잔다. 이 친구와 나가면 재미는 있겠지만 백발백중 밤새 폭음하겠다 싶어, 하나비보러 간다하고는 숙소를 나왔다.

오츠는 교토에서 JR을 타고 1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행정구역으로는 시가켄(滋賀縣)이다. 오츠시는 비와코(琵琶湖)로 더 유명한데, 비와코는 일본에서 가장 큰 호수이자 유명 휴양지다. 호수도 보고 시원한 바람도 쐴 겸, 기내용 담요, 벤또(도시락), 맥주, 과자, 잔뜩 사들고는 오츠역에 도착했다. 아뿔싸 오사카의 30만명 정도는 아니더라도 여기온 사람들 숫자도 만만치 않게 많았다. 영어 가이드북에 조차 나온 축제를 차분하게 즐길 생각을 한 게 잘못이었다.

간신히 자리를 잡고, 벤또를 꺼냈다. 교토역 이세탄 백화점의 벤또 전문점에서 골라온 녀석이었는데, 맛이 괜찮은 편이었다. 하지만, 옆자리에 앉은 가족들이 펼친 거대한 초밥 도시락에 비하면 수수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오츠는 장막이 없어서 물위로 바로 떨어지는 불꽃 송이들을 다 볼 수 있었다는 것과 불꽃이 호수의 양 끝에서 올라왔다는 것 정도의 차이를 제외하면 오사카나 오츠나 하나비는 비슷했다. 어쩌면 불꽃이 터졌을 때의 형상, 패턴, 진행 속도 등등 많은 차이가 났을지도 모른다. 유심히 보면 알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혼자 먹는 도시락의 쓸쓸함을 되새기는 순간, 하나비의 흥취는 사라졌다.

<오츠 하나비에서 찍은 동영상>

흩날리는 벚꽃의 미학처럼 순간성과 유미주의의 결합이 일본 미의 한 특성이 아닐까라고 생각했는데, 하나비도 같은 범주에 들어가지 않을까?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

열 아홉, 스물. 어떤 경계의 양쪽에 발을 걸친채, 어느 한 쪽에 몸을 던지지 못했다. 혁명과 변화를 이야기하는 학생들에게, 너희의 삶이 끊임없이 요동치는 것이 과연 좋기만 하겠느냐고 반문하던 선생의 말뜻을 그 당시에 느끼고 이미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열정과 환희는 삶의 원동력이 아니라, 장강의 흐름 속 파문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는 것 말이다. 뜨거운 가슴하나로 운명을 개척하겠다는 사람들, 우습게 보였다. 하얗게 타버린다는 사람들, 안쓰러워 보였다.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은 토끼나 느끼는 거라고 조소했다. 그리고 생각한 대로 살지 않고 사는 대로 생각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스물아홉, 서른. 십년이 지나고 나서 보니, 하얗게 타버린다고 재가 되어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고, 뜨거운 가슴이 적당히 식어서는 적당히 알아서 산다. 생각한 대로 살다가,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되면서 번쩍했던 과거를 훈장처럼 달고 다닌다. 늦되서 그런 건지, 어긋짱난 구석이 있어서인지, 이제 내 삶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찾아야 할지와 생각하는 대로 사는 것을 고민하고 있다.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3. 산젠인, 가슴이 다시 뛰다.  (0) 2007.01.01
2. 미호 박물관, I.M. 페이의 도원경  (0) 2007.01.01
-1. 나는 떠나기로 결심했다.  (0) 2006.1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