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류 관광엽서사진관

0. 여행지

여행2011. 8. 18. 18:54
2016년 8월: 그리스 아테네, 케팔로니아, 자킨토스, 이탈리아 로마

2015년 5월: 미국 북마리아나제도자치령, 사이판

2014년 12월-2015년 1월: 필리핀 모알보알

2013년 8월: 태국 방콕, 꼬 팡안

2012년 8월: 일본 오사카

2012년 4월: 마카오

2011년 8월: 타이완 지아오시/타이페이

2011년 5월: 터키 셀축, 파묵칼레, 카파도키아, 이스탄불

2011년 1월: 캄보디아 씨엠립(앙꼬르 왓)/똔레쌉 호수

2010년 7월: 독일 예나/라이프치히

2010년 1월: 네팔 카트만두/안나푸르나/포카라

2009년 12월: 홍콩

2009년 8월: 베트남 호치민/무이네

2009년 5월: 독일 프랑크푸르트/풀다/아이제나흐/에어푸르트/바이마르/예나

2008년 7월: 캐나다 토론토/오타와/몬트리올

2007년 7월: 오스트리아 빈/그라쯔, 슬로베니아 류블랴나/보힌, 크로아티아 스플릿/흐바섬/두브로브닉

2007년 1월: 호주 골드코스트/케언즈

2006년 8월: 일본 교토

2005년 6월~7월: 헝가리 부다페스트/센쩬드레, 폴란드 크라코프, 체코 프라하/체스키 크룸로프/쿠트나 호라, 프랑스 파리

2004년 6월~7월: 미국 샌프란시스코/필라델피아/뉴욕

2004년 3월: 싱가폴

2004년 1월: 일본 도쿄

2003년 9월: 타이완 타이페이/타이루거/르웨탄

2003년 7월: 홍콩, 마카오

2003년 7월: 일본 오사카/나라/교토/고베

2000년 1월~2월: 홍콩, 영국 런던/에딘버러/인버네스/스카이섬/스털링/리버풀, 스페인 마드리드/톨레도/세비야/코르도바/그라나다/바르셀로나, 이탈리아 제노아/밀라노/피렌체/로마/베네치아, 프랑스 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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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가고 싶은 곳

여행2011. 6. 2. 11:08

아시아



일본

교토(2003.7, 2006.8)

북해도

 

중국

상해

계림

구채구

 

캄보디아(2011.01)

앙코르와트(Ankor Wat)

 

티벳

라사(Lhasa)

 

인도

타지마할

바라나시(Varanasi)

 

말레이시아

타만네가라(Taman Negara)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Samarkand)


 

중동



요르단

페트라(Petra)

터키(2011.05)

 

에페소(Effeso)

          파묵칼레(Pamukkale)

이스탄불(Istanbul)
          

 

유럽



그리스

산토리니(Santorini)

크레타(Crete)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홍등가(Amsterdam)


프랑스

지베르니(Giverny)

르와르 계곡(Loire Valley)


스코틀랜드

Eilean Donan Castle


잉글랜드

호수지역(Lake District)


포르투갈

포르토(Porto)


스페인

그라나다(Granada)(2000.2)


러시아

St.Petersburg


폴란드

크라코프(Krakow)(2005.7)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Dubrovnik)(2007.7)


노르웨이

피요르드

베르겐(Bergen)


독일

           브레멘(Bremen)

           뤼벡(Lubeck)

           함부르크(Hamburg)

           라이프찌히(Leipzig)

           드레스덴(Dresden)

           마인쯔-코블렌쯔-트리에(Mainz-Koblenz-Trier)


체코

           프라하(2005.7)

           체스키 크룸로프(2005.7)

 

벨기에

           겐트(Ghent)

           브뤼주(Brugge)

           앤트워프(Antwerp)

 

아프리카



나미비아

소수스 플라이(Sossusvlei)

Skeleton Coast

 

탄자니아

응고롱고로(Ngorongro)

잔지바르(Zanzibar)

세렌게티(Serengeti National Park)

 

남아프리카공화국

uKahlamba-Drakensberg

Kruger National Park


모로코

페즈(Fez)


아메리카



페루

마추픽추(Machu Picchu)

 

볼리비아-페루

티티카카호(Titicaca)

 

멕시코

치첸이차(Chichen Itza)

 

브라질-아르헨티나

이구아수 폭포(Iguassu)

 

쿠바

아바나(Havana)

 

칠레

Torres del Paine

 

태평양



호주

Great Barrier Reef(2007.01)

울룰루(Uluru (Ayer's Rock area)),

타즈매니아(Tasmania)

 

제도(Cook Islands)

아이투타키 섬(Aitutaki)

 

뉴질랜드

남섬

Bay of Islands



수정정보

2005년 6월 10일, 터키 이스탄불/파묵칼레 추가: 왜 빠뜨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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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츠(Graz)는 오스트리아에서는 빈(Wien)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도시이다(2008년 현재 거주자 약 29만명). 그렇지만, 제국의 수도였던 빈과 모차르트로 유명한 짤츠부르크와 달리, 이름이 크게 알려진 적이 없는 조용한 2등이었다.

그럼에도 어느 유럽 도시 사람들처럼, 무엇 하나 사소한 것이라도 내세우고 싶어하는 그라츠 시 소속의 관광 가이드는 2003년 유럽 문화 수도가 되면서 처음으로 빈을 제꼈다며 뿌듯해하더니, 심지어 슐로스버그 광장 지하의 주차장은 백화점에서 얼마 이상 사면 무료 주차라느니 등의 자랑 아닌 자랑까지 늘어놓았다.

그러면서 오스만 투르크를 막아내는 데 돈을 많이 쓰느라 발전에 제약이 있었다는 말을 강조했다. 이말도 아주 틀리지는 않을 것이, 그라츠는 오스트리아 남부 쉬티리아(Styria)의 주도인데, 쉬티리아 주의 독일어 이름은 슈타이어마르크(Steirmark)이고, 옛날 독일어에서 마르크(Mark)는 보통 경계지역을 의미한다. 역사적으로도 1481년 마티아스 코르비누스(Matthias Corvinus)가 이끄는 헝가리 제국군, 1529년과 1532년의 오스만 투르크 침공을 막아냈다.

시내를 관통하는 무르강(Mur)변의 언덕위에 서 있는 슐로스버그(Schloßberg)는 문자 그대로 산(Schloß) 성(Berg)으로 1809년 나폴레옹 침공때가 되어서야 항복을 했을 뿐 16-7세기에 빈번했던 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쟁 중 이 지역에서 유일하게 함락되지 않은 요새였다. 내가 갔던 여름에는 옛날 요새 자리에서 재즈 페스티벌이 한창이었다. 이곳까지 오르기 위해서는 계단을 오르거나, 산안에 만든 엘리베이터를 타거나, 아니면 뒷 길로 다니는 전차나 그 길을 따라 걸어 올라가는 방법 등이 있다.

012

여느 도시처럼 시내 중심부에 시청(Rathaus)이 있다. 웅장한 규모는 아니지만, 다른 유럽 건물처럼 내부는 외관보다 커보였다. 시청을 구경시켜준 시 관계자는 시청 발코니는 축구스타나 올라가지 아무에게나 개방하는 것이 아니라며 어서 가서 사진찍으라고 너스레를 떨었는데, 정작 내려온지 10분도 안되어 다른 팀이 올라가있었다. 시민회관(Landhaus)은 이탈리아의 건축가 도메니코 델라리오(Domenico dell'Allio)가 1557년부터 1565년까지 지은 롬바르디아 양식의 건물로서, 오스트리아에 남아있는 중요한 르네상스 건축물의 하나이다. 시민회관은 정원으로 시청과 연결되어 있으며 이곳으로, 1551년 이후 잘 보존된, 약 3만점 이상의 병기류를 소장한 현존 최고의 바로크 시대 무기고에 들어갈 수 있다.

0123

하지만, 그라츠는 어떤 누구도 알 수 있는 인상적인 사건의 주요 장소가 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빈이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사이 변방에서 묵묵히 적의 침입을 막아야만 했던 조연의 서글픔이랄까? 그렇지만 예나 지금이나 대학도시로서의 명성은 대단해서, 6개가 넘는 대학에 4만명 이상의 학생이 지금도 이 도시안에 있다. 총 인구의 거의 25%니 상당한 비율이다. 그래서 그라츠시 홈페이지에서 상주거주 인구와 총 인구를 구분하여 표시하지 않나 싶다.

교육도시로서의 명성에 걸맞게 볼츠만 상수의 볼츠만(Ludwig Boltzmann)을 비롯하여, 특히 의학, 생화학 분야에서 상당수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였고, 유명 지휘자인 칼 뵘(Karl Böhm)이 이 곳 출신이었으며, 원전연주의 붐을 일으킨 지휘자 니콜라스 아르농쿠르(Nicolaus Harnoncourt)가 이 곳에서 자랐다. 2003년 유럽 문화 수도로 선정된 배경에는 이 곳 출신 문화인들의 명성도 한 몫 했을 것이다.

그라츠 대학 친구의 말로는 2003년의 행사는 시 재정에는 재앙이었다고 말했지만, 그래도 두 개의 걸출한 건물을 남겼다. 하나는 무르강위에 인공으로 만든 섬(Murinsel)이고, 다른 하나는 현대미술박물관(Kunsthaus)이다.

01

슐로스버그에서는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같이 올라간 친구들 중 현재 카페로 사용되는 인공섬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는 친구는, 섬이 강바닥에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와이어로 지탱되고 있어, 물살이 센 여름에는 흔들림이 심해 사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나중에 사진으로 본 야경은 괜찮았지만, 불 꺼지고 사람이 없는 금속 구조물은 을씨년스러웠다. 다른 친구들과는 현대미술관이 무엇을 닮았는가에 대해서, 문어의 다리 같지 않냐부터 외계인의 우주선이 저런 모습일 것이라는 이야기로 시시덕거렸다.

어쨋든 그라츠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도시일지 몰라도, 관광객을 주목을 끌거나 세간의 이목이 집중될만한 도시는 아니었다. 동유럽과 맞대어 있는 역사적 경험을 토대로 이민자에 대해 관용적인 정책을 펴기로 한 것이 앞으로 어떤 의미를 남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서유럽의 역사에 밝지 않더라도 이 도시는 누구나 알 수 있는 대스타를 한 명 갖고 있다. 터미네이터 출신의 캘리포니아 주지사 아놀드 슈왈제네거(Arnold Schwarzenegger). 그의 독일어 액센트가 강한 영어는 고향 그라츠에서 비롯되었다. 세계적인 대스타에 대한 자부심이랄까, 귀여우라고 그린 것이 틀림없지만 내 눈에는 우스꽝스럽게만 보이는, 선글라스 쓴 아놀드 캐리커쳐를 표지로 한 자서전이 시내 서점마다 눈에 잘 띄는 곳에 진열되어 있었다.

합스부르크왕가의 행정력이 낳은 유산인지 몰라도 오스트리아 사람들의 감투 사랑은 남달라 보였는데, 시청 및 시내 투어를 시작할 때까지, 시장 비서, 시 교육위원회 관계자, 시 의회 및 주 의회 교육분과위원회 위원장이 돌아가면서 한 마디씩 했고, 또 각자가 자신의 직함을 나열하는 것 만으로도 상당한 시간을 잡아먹었다. 그래서, 그라츠인들의 아놀드 사랑은 그가 주지사라는 타이틀을 가졌을 때 최고조에 다랬는지, 명예의 반지도 수여하고, 축구경기장에 그의 이름을 붙여 슈바르츠제네거 스타디움이라고 했다.

이게 끝이 아니라, 아놀드 주지사가 2005년 국제적인 여론에도 불구하고 사형을 강행하면서 부터 재미있는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강력하게 사형제 폐지를 지지하는 오스트리아 사람들답게(오스트리아는 사형제를 법적으로 폐지한 국가), 그라츠 사람들도 아놀드가 자신들의 자랑스런 아들이 잘못된 일을 했다고 생각했고, 그의 이름을 스타디움에서 빼야 하지 않냐를 시 의회 투표 안건으로 올렸다.

이 소식을 들은 아놀드는 더 이상 자신을 아들로 생각하지 않으므로 반지도 반납하고, 스타디움 뿐만 아니라 그라츠 시에서 자신을 활용하는 모든 선전에서도 이름을 빼줄 것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그라츠 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가 찬반으로 나뉘었다. 당연히 여기에는 정치적 입장이 개입되었다. 사형제를 반대하는 기민당, 녹색장, 공산당, 사민당 등과 경제적 이점을 위해서는 유지해도 되지 않느냐는 보수당으로 갈렸다.(관련기사: BBC, 오마이뉴스) 이후 자세한 전개 과정은 확인할 수 없었지만, 같이 있었던 그라츠 대학의 친구는 투표를 통해 그 이름을 뺐다고 했다. 현재 스타디움의 이름은 UPC-ARENA이다.

지금 그닥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이 보이는 행동은 크게 두 가지다. 납작 업드리거나 끝까지 고집부리거나. 둘다 그나마 가지고 있는 것이라도 지키기 위한 행동인데, 도덕적으로 어느 것이 옳은지 그른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지금 우리 도시를 자랑스럽고 유명하게 하고 싶다. 이에 걸맞는 사람이 나타났지만, 우리 도시 사람들이 반대하는 행동을 이 사람이 했다. 이 사람의 이름으로 우리 도시를 계속 알려야 할까? 과연 그가 한 행동이 정말 나쁜 행동일까?

이러한 문제에 대한 입장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인간이 이러한 문제에 대해 발휘해온 해결책은 집단의 지혜를 빌리는 것이었다. 민주주의는 집단적 지혜의 현대적 표현일 것이다. 인간이 발전시켜온 것은 뇌의 크기도 섹스 능력도 있겠지만, 갈등을 해결하는 방식이었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힘을 가진 자는 이러한 갈등을 은폐시키고자 했지만, 그것이 좋은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은 역사가 보여주었다.

여행 중 만난 초등학교 선생님 한분은 놀라운 이야기를 해주었다. 서울의 한 지역에서 근무하는 데, 서울에서도 유명한 저소득층 지역이 그곳에서 공식적으로 결식아동이면서 급식 지원을 받는 학생이 약 10% 정도라고 했다. 문제는 이러저러한 제도적 장치로 인해 결식아동임에도 급식 지원을 받을 수 없는 학생의 숫자가 상당한 숫자여서 어떤 경우에는 50%까지 상회한다는 것이었다. 교사의 재량으로 이들에게도 지원이 돌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원어민 교사 선발 지시가 내려온 후, 재량으로 사용하던 급식 지원 예산을 원어민 교사 월급으로 지급해야 했으며, 자신은 아이들에게 앞으로는 점심값을 내라는 말을 해야만 했다는 것이다.

지금 당장의 식사와 앞으로의 식사(사실 이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중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 가의 문제는 중요한 가치 판단이다. 둘 중 어느 것이 옳으냐가 그르냐의 문제보다, 더 큰 중요한 문제는 왜 우리가 이러한 문제를 사회적으로 논의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자신을 살 수 있게 하는 무엇이 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의 질문에 대한 답은 누구나 갖고 있거나 찾으려고 한다. 모두 같은 답을 가질 필요는 없다. 문제는 자신의 답이 다른 사람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가이다. 우리 사회는 그러한 시스템이 있을까? 아니 때로 요즘에는 그런 생각 자체가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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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에서
요리사는 프랑스인이고,
기계 수리공은 독일인,
경찰은 영국인,
연인은 이탈리아인,
조직관리는 스위스인이지만,

지옥에서
요리사는 영국인,
경찰은 독일인,
기계 수리공은 프랑스인,
연인은 스위스인,
조직관리는 이탈리아인이다.”
어디 한 군데 살아 보지 않고, 일회성으로 스쳐지나가면서 보고 느낀 것들을 일반화 시켜서 말하기는 힘들지만, 대개의 사람들도 비슷하게 얘기하는 걸 보면, 남한이나 마찬가지로 이탈리아도 어기적 어기적 맞춰가는 나라, 관리의 귀재라는 로마제국의 후손이라기 보다, 좋게 말해 임기응변에 능한 사람들로 보일 뿐이다.

로마에 가면 로마 법을 따르라고. 로마 떼르미니 역에 모여 있던 경찰들은 사고 처리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피자 내기 게임 중이었고, 빅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 기념탑 앞의 도로에서 스쿠터는 폭주족 처럼 질주하고 있었고, 그 와중에 그 길을 무단횡단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5만원을 환전하면 당당하게 1만원을 수수료로 떼어가는 것이 로마의 법이었다.

한때 인터넷 상에서 인기였던, 'Italian들이 다른 European들 처럼 행동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께 바칩니다'로 시작해서, 오가잡탕의 대명사 '피자/스파게티'로 끝을 내는 Europe and Italy라는 플래시를 본적이 있는지? 그걸 보면, Italy를 South Korea로 바꾸어도 다들 고개를 주억거리게 되지 않던가?

<보제토라는 걸출한 애니메이터의 이 작품은 그의 홈페이지(http://www.bozzetto.com/welcome.htm)에서도 감상할 수 있다.>

로마에서 출발해서 피렌체로 가는 기차는 40분 늦게 출발했지만, 피렌체 도착은 시간표 보다 20분을 빨리 도착해버린, 나의 엽기적인 경험을 되새겨 본다면, 무솔리니가 한 일은 기차를 제 시간에 다니게 한 것 뿐이라는 냉소(이말의 진위를 가리기 위해 실증 연구한 결과 실제로는 무솔리니 때 연착 횟수가 더 많았다는 글을 본 적이 있지만)가 충분히 먹혀들 수 있는 그런 동네가 아닐까 싶다.

이네들의 정치 지형과 이합 집산은 예측을 불가능하게 한다. 자고 일어나면 야당이 여당과 한 패가 되어버리는 게 다반사인 나라니까. 최장집 선생님의 표현과 설명에 따른다면, 정부의 집권 엘리트들이 안정적인 의회 소수파가 되었을 경우 다수파를 형성하기 위해, 야당의원들을 포섭하는 공작정치와 이를 가능케 하는 비공식적인 수혜관계(뇌물관계의 학적 표현으로는 참 적절하지 않은가?)에 대해 '변형주의'(transformismo=transformation)라는 공식 학술용어까지 있으니까.

조금 다른 맥락이지만, 1996년, 가열찬 투쟁의 상징이나 다름 없었던 이탈리아 사회당이 당명조차 바꿔가며, 중도파와 좌파의 연합(올리브나무동맹)을 통한 집권조차 그렇고.

자본주의의 심장(지금은 르네상스의 보고로서 관광객으로 먹고사는 도시이지만, 피렌체는 고리대금업의 도시로서 손꼽히는 자본주의 지역이 아니었던가)에 내리 꽂히는 저 낫과 쇠망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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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가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서슬 퍼런 혁명의 상징이라기 보다, 술 마신 대학생들의 치기와 반달리즘으로 뒤범벅되어 버린 앙증맞은 장난일 뿐이기만 하여, 오가잡탕 분위기의 이탈리아 정치와 그 나라의 인상을 다시 생각나게 한다.

우스개로 시작했으니, 우스개로 끝내 보자.

UN에서 설문조사를 했다. "다른 나라의 식량의 과잉 생산과 부족에 대한 당신의 견해를 솔직하게 말씀해주십시오."
유럽인은 '부족'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프리카인은 '과잉'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미국인은 '다른 나라'의 의미를 물어왔다.
중국인은 놀라면서, '견해'의 말뜻을 물어왔다.
반면, 이탈리아 국회에서는 '솔직하게'의 뜻을 놓고 여전히 싸우고 있다.
(The results of a poll made by United Nations came out. The question was: "Please, tell us honestly what is your opinion about the abundance vs. scarcity of food in the rest of the world." The results were as follows:
# The Europeans did not understand what was meant by "scarcity".
# The Africans did not understand "abundance."
# The Americans asked the meaning of the "rest of the world".
# The Chinese, puzzled, asked for an explanation of "opinion".
# Meanwhile, in the Italian Parliament, they are still debating the meaning of "honest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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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해외여행의 겉모습은 나름의 졸업 자축연이었지만, 그 보다는 새 밀레니엄을 이 땅에서 맞이하면 인생이 꼬일 것 같은 근거 없는 기분에 더 나가고 싶었다. 인생이 항상 뜻대로 되지는 않는 법. 결국 불친절한 학사행정으로 2000년 1월말이나 되어야 떠날 수 있었지만.

목적지는 항상 계획과 즉흥의 사이에 있었다. 기차를 타고 가다 마음에 들어 내린다거나, 아리따운 아가씨의 뒤를 쫓아 내리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낯선 곳에 대한 동경만큼이나 두려움은, 같은, 때로는 더 크게 다가왔다.

하지만 페르라셰즈는 가보고 싶었다. 그곳을 가기 위해 비행기를 타지는 않을 테지만, 파리에 가면 꼭 가고 싶었다. 첫 해외여행이었던 2000년 겨울 유럽 여행의 마지막 날, 그곳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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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이면 한국행 비행기를 타야 했다. 솔직한 심정으로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돌아와야, 군대 외에는 선택의 길도 보이지 않고, 답답하기 그지없는 반도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어디에서 살던지 일상이란, 탈출구의 너머에 항상 존재하는 것에 지나지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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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여기에 오고 싶었을까. 먹물든 사람 특유의 관념적 좌파주의, 고종석의 글이 갖고 있는 감성, 삶에 대한 비루한 애정과 생존의 확인......
'나는, 한 주일의 시작을 으레 그렇게 하듯, 페르 라셰즈 묘지로 향했어. 죽은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위로받기 위해서.

그리고 11구역의 프레데릭 쇼팽과 89구역의 오스카 와일드에게 잠깐의 위로를 받은 뒤, 이 묘지 순례의 마무리를 으레 그렇게 하듯, 97구역 앞의 '코뮌 전사들의 벽'앞에 이르렀지. 거기서 산화한 영혼들의 진짜 불행으로, 내 얄팍한 불행의식을 세척하기 위해서.'(고종석, ‘광주의 5월, 파리의 5월’, “고종석의 유럽통신”에서)
두번 째 파리행에서는 돌아오는 항공편이 밤 늦게 출발해서, 오후 5시까지 여유가 있었다. 5년 만에 페르 라셰즈를 다시 찾았다.

5년전 묘지 입구에서 꽃이라도 사갈까 하다 그건 정말이지 속물이겠다 싶어, 잠시 망설이다 10프랑을 주고 지도를 샀다. 묘지에서 무슨 지도냐 생각했지만, 안샀다면 낭패를 볼 뻔 했다. 감만 믿고 돌아다니가는 출구도 못 찾기 십상일 정도였으니까. 5년이 지나도 지도는 유용했다. 죽은 자들이 이사를 다니지는 않을테니까.
 
48구역의 발자크에서 시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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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의, 6구역의 짐 모리슨에서 끝난 2시간여의 묘지 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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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말로 커밍아웃된 바람에 인생 꼬여 버린, 그러나 지금은 뭇 여인네들의 키스 세례를 받고 있는 오스카 와일드의 스핑크스를 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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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의 가장 구석에 가면, 2차대전중 희생된 유태인에 대한 기념탑과 바로 그 코뮌 전사들의 벽이 있다. 벽은 아무말 없이 밀리고 밀려 벼랑끝에서 떨어지는 자들의 모습을 조용하지만 강력한 의미로서 전달하고 있었다.

파리 코뮌의 마지막 하루, 파리 시내의 바리케이트에서 밀리고 밀려, 시 외곽의 공동묘지에서, 그리고 가장 구석까지 밀려 더 이상 갈 곳이 없어, 손을 들고 나왔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정부군의 총알 세례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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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꿈이란 이렇게 밀려 사라지는 것이었을까. 나즈막한 벽에 이름조차 없어 '전사들의 벽'으로 뭉뚱그려진 코뮈나드들에 반해 건너편 프랑스 공산당 지도자들의 화려한 무덤은 또다른 대비가 되었다.

죽은 이들을 위로할 만큼, 그들에게 위로를 받을 정도로 혁명의 부채를 지고 있지 않지만, 여지껏 배워온 유럽사의 함축이 이 곳에 담겨져 있다고 생각해 왔다. 혁명, 문화예술 그리고 보헤미안적 자유 등등.

보헤미안적 자유의 20세기 후반 상징은 짐 모리슨일 것이다. 그의 묘지에 서 있는 흉상은 도난당한지 오래고, 60년대의 아이콘으로 그를 기억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낙서가 반복되고 있고, 경찰 두 명이 산책인지 감시인지 모르게 계속 서성대는 곳이다. 아마 페르 라셰즈를 찾는 상당수의 사람들이 짐 모리슨의 묘지를 찾아오는 것일 것이다. 죽은 자를 찾아오는 산 자의 끊임없는 행렬과 숙명.

이 묘지의 유명인사들, 11구역의 쇼팽, 48구역의 발자크, 85구역의 마르셀 프루스트, 87구역 Crematorium의 마리아 칼라스와 이사도라 덩컨, 44구역의 이브 몽탕과 시몬 시뇨레, 89구역의 오스카 와일드, 꼬뮌전사의 벽, 97구역의 에디트 피아프, 6구역의 짐 모리슨 등 관광객마다 찾는 사람은 틀려도, 그 주변에 가면 말도 서로 건네지 않지만 눈빛 만으로도, 96구역의 모딜리아니를 못 찾아 나와 같이 헤매던 중년의 서양 남자를 보면서도, 동일한 사람의 무덤을 찾고 있다는 묘한 동질감을 주고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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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나는, 무관심이 넘치는 대도시에서 죽은 이의 무덤을 일부러 찾는 중이다.

<어떤 감정도 소용돌이치는 사건들의 흐름을 견뎌내지 못한다. 그것들의 밀물과 조류를 거슬러 헤엄치려고 노력하다보면 열정의 강도가 줄어든다. 사랑은 욕구로 축소되고, 증오는 변덕으로 격하된다. ...... 살롱에서나 거리에서나 아무도 없어도 되는 사람은 아니지만, 절대 없으면 안되는 사람이나 절대적으로 불건전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 파리에서는 모든 것이 용납된다. 정부나 기요틴이나 교회나 콜레라까지도 허용된다. 파리 사회에서 당신은 항상 환영받을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 없어도 아무도 당신을 찾지 않는다.>(발자크, "인간희곡"; 데이비드 하비(2005),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 생각의 나무, p.53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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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2007. 1. 1. 21:58
1. 일본 여행 중 안 좋은 기억이 하나 있다. 시도 때도 없이 복통이 찾아오는 터라, 갑작스레 화장실을 찾아야만 하는 사태가 발생했었다. 이름이 기억 나지 않는 호텔의 화장실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일어섰다.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그때만 해도 듣도 보도 못한 비데가 있었던 것이다.

신기한 게 화장실에 있나 보다 그냥 일어서면 되었으나, 궁금증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버튼을 유심히 살펴보며 내린 결론이 레버로 물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버튼을 눌러서 물을 내린다였다. 내심 훌륭한 추리라 생각하고 자화자찬하고 그쳤으면 될 것을, 굳이 '水'자가 들어간 버튼을 눌렀다. 궁~궁~궁~ 뭔가 돌아가는 소리가 나더니 갑자기 얼굴로 물이 튀기 시작했다.

허둥지둥 움직이다 오줌 싼 모양처럼 바지 가랑이를 다 적시고 말았다. 저 요상한 물총 기계를 멈추고 바지를 말리고 나가야 했으나 끌 방법을 알 수가 없었다. 결국, 바지를 적신 채 그냥 나와서 시내를 돌아다녀야 했다.

교토에서 가장 비싸게 먹은 식사는 豆水樓의 2,000엔짜리 도시락 세트였다. 유바(湯葉)를 먹어보겠다는 일념으로 찾아간 집이었고, 소원성취했다. 떡구이나 두부 튀김 등 일부 단품의 맛이 고르지 않았지만, 나쁘지 않았다. 2층의 폐쇄형 다다미방이라 분위기도 호젓했고 점심을 지난 시간이라 종업원들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아마 여자와 단둘이 갔으면 뭔일을 벌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번에도 문제는 화장실에서 생겼다. 밥 먹기 전 속이 안 좋아서 화장실을 갔는데, 물을 내리고 손을 씻으려고 보니 세면대가 안 보였다. 간신히 서 있을 수 있는 좁은 공간을 두리번두리번 아무리 찾아봐도 세면대는 안보였다. 어디서 물 흐르는 소리가 나는데, 이건 또 뭔 소린지. 여자 화장실에서는 볼일 보는 소리를 감추려고 물을 흘려보낸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여긴 남자 화장실이고...... 수건이 걸려 있는 것으로 보아 손을 씻을 수는 있는 게 분명한데, 설마 일본인이 똥닦은 손을 그냥 저 수건으로 박박 문지르는 것은 아닐테고......

가만히 변기를 바라보니, 변기 위 물통으로 물이 계속 흐르고 있었고, 위에는 수도꼭지 같은 게 달려 있었다. 유레카! 물을 내리면 저 수도꼭지로 물이 나오면서, 손을 씻고 그 물이 흘러 내려가면서 물통을 채우는 거군. 에너지 절약. 하지만, 이미 때가 늦어 물통이 거진 차 가고 있었다. 결국, 물을 한 번 더 내리고 손을 씻고 나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식당의 화장실 사진을 찍지는 못했고 동일한 구조의 화장실 사진을 구글 검색으로 찾았다.


2. 2003년의 일본은 지방선거 중이었다. 이번에도 지방선거가 진행 중이었는데, 그중 눈길을 끈 것은 공산당 포스터였다. 쿠데타는 많았으나, 아래로부터의 혁명은커녕 그와 유사한 사건조차 없었던 나라에서 공산당의 전통이 무슨 의미일까 싶은 일종의 비아냥도 들었지만, 공산당조차 없는 나라에서 온 사람이 무슨 토를 달 수 있을까. 어찌 되었든 뚜렷하게 포스터에 박힌 '共産黨'은 한자 그 자체로의 의미대로 인상적이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2003년 철학의 길을 걷다가 본 공산당의 선거 포스터. 이라크전 반대 문구가 또렷하다.


숙소에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 교토에서 일본 공산당이 얻는 지지가 자민당을 뛰어넘거나 거의 같을 것이라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아마 전국적으로도 공산당의 세력이 가장 큰 곳 중의 하나일 수 있다나. 왜 그러냐니, 자기도 정확히 말할 수는 없고 대충 교토의 기질이 그렇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라고 설명해주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2006년 포스터. 오사카에서 잠시 만났던 casaubon형의 앨범에서 불펌. 나와 형은 공산당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예쁜 얼굴이라 당선 되야 한다는 합의를 봤다.


돌아와서 읽은 김윤식의 '청춘의 감각, 조국의 사상'에도 일본인의 글을 인용하며 비슷한 의미로 딱히 꼬집어 설명할 수 없는 교토인의 반골(?) 혹은 저항(?) 기질이 언급되어 있었다.

지금도 교토인은 교토라 부르지 않고 기요라 하거니와, 호상과 절 중심으로 발달한 이 중세 헤이안조의 자존심을 지닌 교토는 지층이 함몰된 호수 밑바닥(호저부지)이어서 여름엔 찌듯이 덥고 겨울엔 몹시 춥다. 교토의 역사 속에는 이러한 지리적 조건과 함께 정치적 조건도 은밀히 배어 있음이 드러난다. 교토는 전제 지배자에 의해 쓰라린 경험을 했다. 1568년 노부나가가 입경했을 때 그전의 지배자와는 썩 달랐다. 새로운 기대감과 공포감이 교차했는데, 두번째 입경 때 그는 그의 출영을 위해 사람들을 동원하도록 강요했으며, 도시를 지켜주는 대가를 요구했고 이를 거부한 귀족층을 토벌했다. 그 다음 장군으로 등장한 히데요시는 탄압적으로 나오지 않고 호상들과 제휴하여 정치에 임하였고, 그로인해 봉건 도시로서의 권위와 체모를 유지시켰다. 히데요시는 이 도시의 자체를 풍성하게 만들었으나, 그 뒤를 이은 이에야스는 교토를 버리고 에도로 막부를 옮김으로써 교토는 정치의 중심부에서 멀어져갔는데, 그로부터 메이지유신까지 천황을 중심부에 둔 기품과 세련성을 지닌 도시로 남았던 것이다.


역사적 적자가 정치적 서자로 격하된 것에 대한 반발과 상인의 자존심이 얽힌 것이 교토의 저항 기질이라고 보면 될까?

3. 대중목욕탕 센토(錢湯)

오사카의 비지니스 호텔은 싼 가격 답게, 호텔 전체에 단 하나의 샤워시설만 있었다. 번잡한 아침 시간에 먼저 사용할 수 있게 해준 친구가 있었는데, 내심 오래 기다리지 않고 쓸 수 있어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왠걸 여자친구와 같이 샤워하기 위해 나에게 자리를 양보한 것이었다.

샤워 부스의 크기로 보건대 무흣한 상상을 실천했다기 보다, 여자 친구가 사용할 수 있게 대신 기다렸거나, 기다리는 시간을 줄인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지만, 고마웠던 마음은 싹 사라졌다.

교토의 숙소는 자체적인 목욕시설이 없어 주변의 센토를 이용해야 했다. 이 기회 아니면 언제 가보겠냐 싶어 열심히 다녔다. 단체로 등산 다녀온 후 목욕하러 갈때 외에는 대중목욕탕을 갈 일이 없고, 그 흔한 찜질방조차 안가니, 한국에서도 자주 하지 않는 경험이었다.

자주 가던 센토는 숙소에서 가깝기도 했지만, 입구에 걸려있는 큼지막한 츠바키 포스터의 미녀들이 반가워서라도 찾게되는 곳이었다.

소문에서처럼 남탕과 여탕을 다 관찰할 수 있는 주인장의 자리가 있지는 않았다. 입구에서 돈만 받을 뿐이었다. 일본 목욕탕은 한국 목욕탕과 흡사한 구조였다. 천장이 뚫려 있어 여탕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다 들리는 게 처음에는 야릇한 자극이었지만, 이런 종류의 모든 자극이 그렇듯 시간이 지날 수록 익숙해졌다.

탕의 크기가 한국의 대중목욕탕보다 훨씬 작았고, 서서 사용할 수 있는 샤워시설이 없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랄까. 사우나는 한국보다 좀 더 뜨거웠고. 전기탕이라고 물속에 전류가 흐르는 탕이 있었다. 겁이 나서 가슴까지는 못 집어넣고 다리만 넣고있다 나왔지만, 저릿저릿한 느낌이 좋아서 매일 애용했다. 맥주 한 잔 마시고 들어가보고 싶었지만, 그럴 용기는 없었다.

p.s. 위키에서 검색(영문)해 보니, 외국인을 받지 않는 센토가 있어 인종차별로 고소를 당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일본의 인종차별에 대한 단면을 엿볼 수 있는 사건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어떨까? 불을 보듯 뻔하지 않을까 싶다. 아시안계가 힘이 없으니 고소가 안 일어난 것 뿐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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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에 왜 또 가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우습지만 논문쓰러 간다고 했다. 농담으로만 한 말은 아니라 맥북과 논문 다섯 편, 얇은 책 한권을 가방에 넣었다.

꼭 그런 의무감 때문은 아니었고, 밤마다 벌어지던 술판과 사람들과 이야기 하는 것도 슬 지겨워지고 교토에 온지도 2, 3일쯤 지나고 나니 글을 좀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점심 무렵이면 아무도 없는 숙소에서 글을 읽는 것은 가능했지만, 쓰는 것은 힘들었다. 교토대나 교토 국제회관이 생각났지만, 기왕이면 색다른 장소가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교토에 산 사람도 아닌데 학교가 아니면서 글을 쓸 만큼 여유로우면서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을 어떻게 쉽게 찾을 수 있을까? 교외의 절에 가면 될 듯 싶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실소를 자아낼만한 데, 절을 찾으려고 가이드북을 뒤졌다. 관광지에 가서 논문을 쓰겠다니 참 나 원.

그렇게 찾은 곳이 오하라(大原)였다. 교토에서 한 시간 정도 거리면 사람이 많지 않을 성 싶었다. 단풍철이면 사람으로 가득찬다는 말의 의미를 못 봤는지, 아니면 애써 무시했는지 모르겠다. 교토역 버스 정류장에서 17번인가 18번인가 버스를 탔다. 교토시영지하철 국제회관역에서도 버스가 서길래, 내릴까 잠시 고민했다. 그래도 기왕 나선 거 가봐야되지 않겠나 싶어, 계속 앉아 있었다.

심심하기도 했고, 내릴 곳을 확인하기 위해 물어볼 사람이 없을까 싶어 차내에서 두리번 두리번거렸는데, 반대편 창가에 앉아있는 예쁜 아가씨가 눈에 들어왔다. 다시 한 번 일본어를 배워둘 걸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안내방송에서 오하라라는 말이 들렸고, 친절하게도 차내 전광판에는 OHARA라는 알파벳까지 떴다. 순간 아차 싶었다. 여기 꽤 유명한 관광지구나. 말이라도 붙이지 않고 내리면 아쉬움이 될 것 같아, 여기가 오하라 맞냐고 영어로 물어봤다. 놀라지 않고 친절히 영어로 답해주길래, 오히려 내가 놀랐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오하라 일대 지도. S라고 된 곳이 버스정류장일 듯 싶으며, 라이고잉 너머 산길을 따라가면 무음 폭포가 있다. 지도 출처: Jtour


버스 정류장에서 나와 길을 건너 팻말을 쫓아 리쯔가와(律川)천변을 올라가니 여느 관광지처럼 길 옆으로 카페, 식당, 상점이 늘어서 있다. 굳이 가이드북의 조언을 보지 않더라도, 봄이면 난리 벚꽃장이나 가을이면 단풍 만큼 인간 병풍이 펼쳐질 것이 분명해 보인다. 물에 담은 오이와 일본식 짱아찌를 파는 가게가 있었는데, 마실 물이 충분했던 터라 오이를 먹어볼 생각이 들지 않았다. 게다가 좀 짜 보였다.

오이로 목을 축이는 것 보다는 밥을 먹는 일이 급선무였다. 점심때가 약간 지나서였을까, 식당에서 밥먹는 사람들이 안보였다. 아직 일본에서는 관광지 앞 식당이라고 해도 황당할 정도로 맛없는 식사를 먹어본 적이 없어서 어느 집을 들어가던 최소한의 기본은 하겠거니 싶었지만, 1,000엔 이하로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는 가격을 보고 있으니 기본보다는 조금 나은 집에는 가야하지 않겠나 하는 욕심이 슬몃 들었다. 살짝살짝 이집 저집 기웃거리다가 여남은 명이 식사 중인 식당을 발견하고 들어갔다.

메뉴판을 보니 오하라메(おはらめ, 大原女) 벤또가 있다. 올라오며 大原女를 자주 봤는데, 버스에서 만난 아가씨도 있었겠다 혼자 생각에 한국의 XX 아가씨처럼 이 동네에 미인이 많나보다 싶어 오하라메 벤또를 주문했다. 맛은 그럭저럭. 굳이 따진다면 맛없다에 가까웠다. 소박하면 정갈한 맛이 있어야 하는 데, 소박하기만 했지 정갈한 맛은 아니었다. 그나마 맛없어져 가는 동치미를 사이다로 되살리는 얄팍한 수는 아니라 다행이었다. 그냥 무미한 동치미를 먹는 기분이었다.

돌아와서 찾아보니 오하라메는 상상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였다. 오래전 오하라는 가난한 마을이어서 젊은 처자들이 교토시내로 땔감행상을 나갔단다. 그래서 오하라메라는 말은 생활력 강하고 건강미 넘치는 여인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오하라에서는 오하라메 인형을 특산물;로 팔고, 해마다 5월이면 축제를 한다고 한다. 이름만 놓고본다면 점심 주문은 잘못한 셈이었다.

식당을 나와 계속 산을 향해 올라가다 적당히 왔다 싶은 느낌이 들었을 때 왼편으로 산젠인(三千院, 한국어로 읽는 한자 발음은 삼천원이다. 좀 싸보이는; 느낌. 그래서인지 팻말을 보고도 산젠인이 아니라고 생각하고는 길을 헤맸다는 여행자도 있단다.)과 호센인으로 가는 길이 있었다. 산젠인 입구에는 산젠인몬제키(三千院門跡)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몬제키는 황족들이 절에 재산을 기부하고 주지를 하는 사원이라고 한다. 산젠인은 5대 몬제키 사원 중의 하나이다. 伝教大師(767-822)가 창건했는 데 그 이후 32명의 주지가 황족이었다고 한다.

산젠인 입구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담장으로 둘러쳐져 덩그마니 현판만 내걸려 있는 것이 절이라기 보다는 사극에서나 본 지방 관아같다. 한국 절에서 친숙한 일주문, 대웅전, 그리고 뒷편이나 어디 구석진 곳의 삼신각이 일렬로 늘어선 가람 배치와는 전혀 다르니 일본 절은 일본 절이구나하는 느낌이 든다.

산젠인의 관람 코스는 입구부터, 갸쿠덴(客殿), 슈헤키엔, 신덴(寢殿), 오조 고쿠라쿠인(往生極樂院), 부동당, 관음당, 아지사이엔으로 이어진다. 산젠인의 멋은 건물과 불상 보다는 갸쿠덴과 신덴에서 바라보는 정원과 명상의 시간이었다.

갸쿠덴 툇마루의 붉은 방석에 앉아 이끼, 나무, 석탑이 어우러진 슈헤키엔을 보고 있으니 낚시만 들이지 않았다 뿐이지 세월을 낚는 강태공이 따로 없었다. 많지는 않았지만 적다고는 할 수 없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지나가고 있었다. 경내 분위기때문이기도 하지만 대개의 관광객들이 중년을 지난 사람들인 터라 조용하기는 했어도 글을 읽을 수 있는 분위기는 못 되었다. 사람들 때문이 아니라, 정원을 보고 있으려니 내면의 자신과 이야기하게 되지 다른 사람의 글이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갸쿠덴에서 본 슈헤키엔


두 번째 건물인 신덴은 천황이 이 곳을 방문했을 때 머무는 곳이라고 한다. 천황이 머무는 니지노마(무지개방)라는 방이 있고, 천황의 친족이나 천황이 죽었을 때 천도법회를 여는 곳이라고 한다.

건물 한켠에서는 산젠인의 아름다운 모습을 담은 사진전을 하고 있었다. 걸려있는 포스터로 봐서는 사진 작품 공모 중인 듯 싶었다. 잘 찍기도 잘 찍었지만 산젠인은 봄의 벚꽃, 여름의 보랏빛 수국, 가을의 붉은 단풍, 겨울의 눈 밭, 사계절과 모두 잘 어울리는 곳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사진 중에서도 가장 유명해 보이고, 눈에 띄는 경관은 신덴에서 바라보는 오조 고쿠라쿠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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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 삽입 이미지신덴에서 바라본 오조 고쿠라쿠인


오조 고쿠라쿠인, 우리말 식 한자 발음으로는 왕생극락원. 986년 헤이안조에 건축된 건물로서, 일본 국보인 아미타 삼존불상이 안치되어 있다. 일본의 금불상에는 흥미가 없고, 이끼낀 정원을 거니는 것이 더 좋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부동당으로 가는 길. 대나무에서 나오는 물은 금색수라 한다. 저 물을 마시면 무병장수, 행복, 뭐 이런 것들이 온다고 적힌 팻말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돌아와서 산젠인을 검색해보니, 다음과 같은 설명이 나왔다. "신덴은 새로 지은 건물이라 그 자체로는 볼 것이 별로 없지만 이곳 마루에 걸터앉아 보는 풍경은 아름답다. 삼나무와 이끼로 만들어진 정원과 거기에 서있는 오조 고쿠라쿠인(往生極樂院) 건물이 잘 어우러져 보는 것 자체를 명상(瞑想)이 되게 한다. 이것이 오하라에서 만나는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 될 가능성이 많으니 잠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숨을 고르자."

신덴의 마루에서 보낸 한 시간여는 분명 오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그것은 비단 풍경이 좋아서였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녀를 만났기 때문이었다.

식상한 이야기지만 서른이 넘으면 가슴 떨림이 사라지면서 편안함과 아쉬움을 느끼게 된다고 하는데, 물리적 나이와 관계 없이 20대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길고긴 길었던 연애가 남긴 것은 내가 다시 한번 여자를 보고 가슴이 떨릴까 하는 의문이었다. 이제는 약간의 매너와 노회함이 유일한 무기이고, 솔직하게 타오르는 애정으로 돌진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연애 감정을 다시 느끼지 못하지 않을까라는 두려움이었을 뿐만 아니라, 아름다움을 다시 느끼지 못하지 않을까라는 두려움이었다. 학교에 개나리와 진달래가 피는 지 그녀와 연애를 하며 알게 되었고, 아름답다는 느낌을 그때 처음 가졌다. 올해 봄에도 개나리와 진달래가 폈지만, 폈다는 사실만 눈에 들어올 뿐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환상은 사라지고 현실만 남아있는 황량한 세계만이 앞으로 펼쳐질 것 같았다.

하룻밤의 쾌락을 위한 감언이설로써, 상대도 대충은 짐작하겠지만 같은 효능이라면 당의정 정로환이 먹기 편한법이니까, 아름다움을 이야기 할 수 있겠지만, 정말 아름답다는 감정을 갖고 그것을 입에 올릴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은 예뻤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옆 모습은 처마 밑으로 살짝 쏟아지는 햇살, 여름의 초록빛 이끼, 갈색 나무 건물이 자아내는 분위기와 완벽하게 어울렸다. 그녀를 보며 내 가슴은 다시 뛰었다.

그것은 다시 찾은 아름다움이었다.

<오하라 여행에 참고할만한 홈페이지>
Jtour의 오하라 소개.
오하라 및 주요 관광지 소개, 일정 예시 등 관광 정보('혼자 여행을 즐기는 젊은 여성들에게 인기 있는 곳으로 이곳에서 기념촬영을 하는 젊은 여성들의 모습을 쉽게 만날 수 있다.'는 독특한 설명이 있다.)

오하라에 다녀오신 비누님의 여행기.
글도 재치있게 쓰시고, 사진을 많이 찍어오셔서 보기 좋았다.(링크를 허락해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산젠인 홈페이지(일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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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에 세운 '스프링'을 놓고 이러쿵 저러쿵 말이 많나 보다. 작년에 클래스 올덴버그가 조형물 설계자로 결정된 이후 부터 그런 말들은 계속 나왔다. 파이낸스 센터를 몇 번 지나가며 보기는 봤는데 특별한 인상이 남질 않았다. 마치 그의 빨래집게를 알고 있었지만 필라델피아에서 봤는지 안봤는지 긴가민가 싶은 것처럼. 뭔가 쌩뚱맞은 녀석을 보기는 한 기억이 있긴 한데.

I.M. 페이가 루브르에 세운 유리 피라미드처럼 시간이 지날 수록 평이 좋아지거나, 모방의 대상(이를테면 뉴욕 5th Ave.의 애플 스토어처럼)이 될 수 있을 지 모르겠다. I.M.페이의 그랑 루브르 유리 피라미드는 옆에서 보면 어색하지만, 루브르 궁 정면에서 보면 썩 어울리는 편이고, 보면 볼 수록 마음에 든다.

교토 근방에 I.M.페이가 설계한 미호 박물관(MIHO MUSEUM)이 있다.

JR 교토역에서, 비와코센(琵琶湖線)을 15분쯤 타고 이시야마역(石山駅)에 내린 후(2006년 여름 기준 260엔), 버스 정류장 쪽 출구(남쪽)로 나와 3번 승강장에서 미호 박물관 행 테이산(帝産) 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내린다. 버스는 한 시간에 한대 꼴로 다니고, 승강장에 한국어를 포함한 각국 언어로 짧은 안내물이 붙어 있다. 편도 요금 800엔. 소요시간은 45~50분 정도. 종점과 기점을 연결하는 것이니 마음 편하게 한 숨 푹 자도 되고, 가는 길의 주변 경관을 봐도 된다. 산골로 들어가는 주변 경관도 아름답다.

시가켄(滋賀県)의 시외버스는 뒤에서 타면서 번호표를 받는다. 기점에서 타면 1번 번호표, 그 다음 정류장은 2번 번호표 이런 식으로. 요금은 차에서 내리면서 내면 되고, 전면 유리창 위를 보면 자기가 탈 때 받은 번호가 보이고 그 밑에 요금이 표시된다.

주차장(이 근처에도 상당히 괜찮은 공원이 만들어져 있다)에서 올라가면 매표소가 나온다. 매표소에는 식당과 빵집이 있다. 유기농으로 키운 재료만으로 음식을 판다는 점을 강조했는데, 정말 유기농인지는 그런가 보다 믿을 뿐이고, 우동과 다꽝이 조미료 없이 만든 담담한 맛이라 괜찮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삶의 여유가 넘치지는 않지만, 적당하니 있는 그런, 예순은 훨씬 지났을 것 같은 노인들만 식사를 들고 있었다.

나와서 찬찬히 올라가는 길에 만난 사람들도 모두 곱게 늙은 노인들 뿐이었다. 간혹 보이는 젊은이들은 소풍나온 연인들이었고. 홀로 다니는 사람은 나 뿐이었다. 하지만, 산에서 떨어져 죽어야겠다는 심정이 들만큼 외롭지는 않았다. 박물관 전경을 두고 죽기에는, 경관이 너무 아름다웠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식당, 빵집, 기념품 판매소, 화장실 등이 있는 매표소. 사진 왼편과 오른편에 보이는 잔디밭에는 탁자와 의자가 있어서, 매표소 안의 에어컨 바람에 뼈가 시릴 정도로 추운 사람에게는, 나와서 책을 보는 것이 더 좋을 수도 있겠다.


입장료는 성인 1,000엔, 학생 800엔. 교토 시내 왠만한 절 입장료가 500엔이고, 박물관이 1,000엔인 것에 비하면 비싼 것은 아니지만, 중앙박물관 입장료가 2,000원인 우리 기준으로는 싼 값은 아니다. 사설 미술관인 리움이 10,000원이고 특별전도 그 정도인 것에 비하면 비싼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학생증을 들고 가서 200엔 할인 받은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아마 그것은 작년에 체스키 크룸로프의 에곤 쉴레 미술관에 들어갈 때 학생 확인이 안되니 할인 해줄 수 없다며 직원과 실랑이를 한 기억때문일 것이다. 국제학생증을 별도로 만들어가지 않았는데, 동행했던 사람의 학생증에는 university가 찍혀 있어 학생이라는 게 확인이 되지만, 내 학생증에는 학생임을 확인할 수 있는 문구, 즉 알파벳으로 적힌 것이 하나도 없으니 학생할인을 해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저 사람보다 어려 보이는 내가 학생이 아닐리 있겠느냐는 이유로 우기고 있으니, 귀찮았는지 학생요금으로 들여보내주기는 했지만 기분은 찜찜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돈 몇 푼의 문제가 아니라 학교의 자존심;;이자 내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던 것 같다. 그는 학부 시절 다니던 국립대 학생증을 내밀었고, 나는 보통 사용하던 내 학생증을 보여주었으니까. 재미있었던 것은 그 미술관은 보물찾기 놀이 하듯 에곤 실레의 작품을 꽁꽁 숨겨 놨는데 그렇게 보고 싶어했던 그 형은 보지 못하고 나만 봤다는 것이다.

여담인데 에곤 실레는 미성년 강간 혐의로 체스키 크룸로프에서 1년만에 추방되었다. 그는 그 동네를 꽤 마음에 들어해서, 마을을 대상으로한 몇 개의 작품을 남겼다. 하지만 자신을 추방한 마을에 자발적으로 작품을 기증할리는 만무했을 테고, 사후에 워낙 유명해져서 소규모 미술관 차원에서 구입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체스키 크룸로프의 에곤 실레 미술관에는 드로잉 몇 점만 실레의 이름으로 걸려 있을 뿐이다.

미호 박물관에서도 처음에는 내 학생증을 보고 학교를 확인할 방도가 없다는 투의 표정을 지으며, 옆의 매표원에게 조언을 구했다. 작년 생각이 잠시 나서 1,000엔짜리를 꺼내 들으려니, 학생증을 가리키면서 어느 것이 학교 이름이냐고 물어왔다. 망설임없이 밑줄을 그어 알려주니, 그제서야 할인을 해주었다. 이후 다른 곳에서도 학생할인을 받을 일이 있었는데, 이 곳처럼 세세히 보지는 않고 그냥 학생증 같은 카드를 내나 안내나만 확인했다.

아무튼 I.M.페이는 미호 박물관을 일명 무릉도원이라고도 하는 도원경을 형상화하여 설계했다. 무릉도원 고사에서 어부가 복숭아 향기를 따라 강을 거슬러 올라가듯, 매표소에서 박물관 본관 까지는 약 2km 쯤 떨어져 있고, 이를 걸어가야 한다. 노약자를 위해서 골프 카트 모양의 전기 자동차가 다니는 데, 속도는 빠르지 않다. 천천히 뛰는 정도. 그러니 산책 삼아 걸어 올라가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어부는 작은 동굴을 지나 도원경에 이르게 되는 데, 그와 비슷하게 터널을 지나야 박물관에 이를 수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터널 입구. 이곳까지 오는 길도 주변 숲이 울창해서, 걷기 좋은 데다 마침 태풍이 지나가는 날이라 바람이 불어서 나뭇잎 소리 듣기가 좋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터널 내부. 금속성의 터널이, 도원경 고사의 동굴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지만, 이질감 없이 잘 어울리는 편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터널의 끝. 멀리 보이는 건물이 박물관 본관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터널을 나오면 마지막으로 다리를 건너야 박물관 본관에 이를 수 있는데, 다리 좌우로 펼쳐진 산이 아름답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박물관 입구


입구에 들어서서 정면을 바라보면, 햇빛이 유리창을 지나 부드럽게 쏟아지며 넓은 공간에 따뜻함을 뿌린다. 한눈에 들어오는 주변 경관이 아주 아름답다. 설계자의 의도대로 자연 속에 파묻힌 별천지 같은 공간이다. 매표소부터 길, 다리, 박물관 본관까지 금속과 유리라는 첨단 제품으로 만들어졌음에도, 위화감 없이, 산과 잘 어울렸다. 통나무, 토담집만 자연과 어울리는 것은 아니다. 물론 알루미늄 덩이가 항상 도시와 어울리는 것도 아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박물관에 들어서서 정면을 보이는 경관. 일본식 정원에서 영감을 받아 설계한 티가 역력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박물관 내부의 기하학적 골조. 기념품으로 파는 엽서에는 이 곳에 조명을 비추어 찍은 사진을 파는 데, 참 아름답다.


작은 규모에 비해, 고대 이집트(세상에 이집트 유물과 피카소 그림 없는 박물관은 없다지만), 고대 그리스(누군가의 정원에서 떼어온 프레스코화와 우물가의 모자이크는 볼만하다), 고대 로마, 남아시아, 중국, 이슬람 등 소장품의 범위는 넓은 편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간다라 양식의 불상. 자연적인 채광을 이용하여 미술품을 전시한 상징적인 사진이다. 햇살의 따스러운 느낌이 불상의 온화한 미소를 더욱 부드럽게 만든다. 출처: 미호 박물관 홈페이지


냉정하게 말해,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전시품 들 중 특별하거나 유명한 것은 없다. 박물관 자체가 소장품 보다 더 아름다운 작품이랄 수 있다.

건축을 좋아하는 사람, 근교에 당일치기 데이트하러 갈 수 있는 분위기의 여행지를 좋아하는 사람, 마음과 몸의 시간 모두 넉넉한 사람에게 적극 추천할 만한 곳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박물관 반대편 산에서 찍은 박물관 전경. 사진 상태가 안 좋은데, 팸플릿에 나온 사진에는 산안개가 살포시 퍼져 있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출처: 미호 박물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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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는 관광객 유치때문인지 불꽃놀이가 많아 졌지만, 예전에는 가뭄에 콩나듯 서울 올림픽인가 서울 아시안 게임인가의 폐막식처럼 특별한 날에나 볼 수 있는 행사였다. TV로 보았던 그 때의 불꽃놀이는 무척이나 유치하게 보였다.

많은 전세계인이 그러하듯 나도 일본 문화의 상당 부분을 만화에서 익혔는데, 열혈야구 만화를 가장한 청춘 애정 만화 H2를 보면 여름에는 갑자원 뿐만 아니라 하나비가 열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년전에 갔던 간사이 여행에서는 하나비 소식을 듣지 못했으니, 7월말부터 8월 중순이 하나비 시즌이 아닐까 싶다. 그 때 못 가본 것이 아쉬어 이번에는 꼭 가보고 싶었다. 하나비 날짜를 일일이 확인할 수는 없었고, 다만 론니 플래닛을 보니 매해 8월 8일에 교토 근처 오츠에서 하나비가 있는지, 그때 교토에 있다면 꼭 가보라고 소개되어 있었다.

하지만 막상 교토에 가서 보니 매일매일 일본 전역이 하나비였다. 일본에서는 보통 거리 판촉물로 포켓 휴지를 줘서 여행 내내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서도 유용하게 써먹었는데, 이번에는 여름이라 그랬는지 부채를 줬다. 거리에서 나눠준 판촉용 부채 중 하나는 아예 8월 한달 간사이 지방의 하나비 일정이 나와 있었다.

8월 5일 숙소에 짐을 풀고 빈둥 거리고 있었는데, 태국 출신인 켐이 저녁에 하나비 구경을 가잔다. 내가 알고 있었던 것은 8월 8일 오츠 하나비 뿐이라, 그게 날짜가 바뀐 거냐고 물어봤더니, 8월 5일 하나비는 오사카에서 한단다. 한낮에 땀 삐질거리며 오사카에서 교토로 넘어왔는데, 그날 밤 다시 오사카로 넘어가자니 좀 귀찮았다. 연신 갈지 안 갈지 잘 모르겠다고 그러니, 이 친구 결정타를 날린다. 자기가 도쿄에서 보고 왔는데, 불꽃놀이는 그냥 불꽃놀이고, 유카타 입고 오는 여자애들 구경하는 게 훨씬 재미있단다. 아, 그래? 그럼 가야지. *^^*

오사카 하나비의 공식 명칭은 헤이세이 요도가와 하나비 다이카이(平成淀川花火大會). 2005년에 30만명이 관람했다고 한다. 쏘아올리는 불꽃은 2만발. 교토 TIC에서 강변에 가까운 JR역을 소개해주었는데, 밥도 먹고 구경도 할 겸 JR 오사카 역에서 걸어가기로 했다. 천천히 사람들 따라서 북쪽으로 2~30분쯤 걸어가면 요도가와 강이 나온다. 가는 사람들이 많아서 시간이 좀 걸리지 평상시 같으면 걸어서도 20분 이내로 갈 수 있을 듯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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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변에 도착하면 돈을 내는 자리와 무료로 보는 자리로 편이 갈리고, 그 뒤로는 적당히 빈 자리 찾아서 앉으면 된다. 불꽃놀이 시작하기 1시간 전 쯤인 저녁 7시에 강변에 도착했는데, 강변의 절반쯤 그리고 강둑 가득 이미 사람들이 꽉꽉 들어차 있었다. 거나하게 피크닉 파티를 벌이고 있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앉았다. 안전용 막인지, 유료 관객과 무료 관객을 가르는 막인지 용도를 모르는 장막이 바로 앞에 쳐져 있어서, 불꽃이 낮게 뜨면 보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켐의 말대로 유카타 입고 여자들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핑크색 옷을 입은 귀여운 아가씨들이 많았는데, 옷이 무척 불편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물어보니 불편한 것은 둘째치고 옷이 덥단다. 그런데 사람보는 재미는 잠깐이고, 맥주나 음료수를 사왔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켐이 나름 핸섬하게 생기고 키도 커서 앞자리에 앉은 아가씨들 꼬셔서 맥주 얻어 먹자고 살짝살짝 부추겨 봤는데, 별로 생각이 없는 듯, 도쿄에서는 시부야 여자애들이 이쁘단 소리만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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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되어서 하나비는 시작하고. 아무 생각없이 입구에 가장 가깝다는 이유로 앉은 자리였는데, 바로 앞에서 불꽃이 터지기 시작했다. 터지는 높이도 장막에 가리지 않을 정도로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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켐의 말로는 도쿄의 하나비에선 12만발이 터졌는데, 좀 지루했단다. 하지만 오사카의 하나비는 속도감있게, 한편으로는 스펙타클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다채로운 문양의 불꽃송이들이 하늘을 갈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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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의 제왕에서 간달프가 만드는 펄펄 날아다니는 용 정도는 아니어도 하늘에 불꽃으로 꽃과 나비, 하트, 글씨 등을 쓰기도 하고, 폭포수처럼 쏟아지기도 하는 게 재미있고 신기하기도 했다. 불꽃 장인에 관한 만화를 읽은 적이 있는데, 매년 새로운 불꽃을 만들어서 사람들을 즐겁게 해줘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범죄를 저지르던가 그런 내용이었을 거다. 충분히 그럴만하겠다 싶었다. 매년 30만명이 모여서 즐기는 행사가 흔한 것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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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8일은 교토 근교의 미호 미술관을 보고 저녁에 오츠(大津)에서 하나비를 보는 것으로 일정을 잡았다. 그런데 오츠역에 도착하니 태풍으로 하나비를 11일로 연기한다는 공문이 붙어 있었다. 11일이 되기는 했는 데 전날 밤새 숙소에서 사람들과 얘기하느라 잠이 부족한 탓에 꼼짝하기가 싫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뒹굴거리고 있는데, 이번에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알렉스가 같이 시내에 나가잔다. 이 친구와 나가면 재미는 있겠지만 백발백중 밤새 폭음하겠다 싶어, 하나비보러 간다하고는 숙소를 나왔다.

오츠는 교토에서 JR을 타고 1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행정구역으로는 시가켄(滋賀縣)이다. 오츠시는 비와코(琵琶湖)로 더 유명한데, 비와코는 일본에서 가장 큰 호수이자 유명 휴양지다. 호수도 보고 시원한 바람도 쐴 겸, 기내용 담요, 벤또(도시락), 맥주, 과자, 잔뜩 사들고는 오츠역에 도착했다. 아뿔싸 오사카의 30만명 정도는 아니더라도 여기온 사람들 숫자도 만만치 않게 많았다. 영어 가이드북에 조차 나온 축제를 차분하게 즐길 생각을 한 게 잘못이었다.

간신히 자리를 잡고, 벤또를 꺼냈다. 교토역 이세탄 백화점의 벤또 전문점에서 골라온 녀석이었는데, 맛이 괜찮은 편이었다. 하지만, 옆자리에 앉은 가족들이 펼친 거대한 초밥 도시락에 비하면 수수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오츠는 장막이 없어서 물위로 바로 떨어지는 불꽃 송이들을 다 볼 수 있었다는 것과 불꽃이 호수의 양 끝에서 올라왔다는 것 정도의 차이를 제외하면 오사카나 오츠나 하나비는 비슷했다. 어쩌면 불꽃이 터졌을 때의 형상, 패턴, 진행 속도 등등 많은 차이가 났을지도 모른다. 유심히 보면 알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혼자 먹는 도시락의 쓸쓸함을 되새기는 순간, 하나비의 흥취는 사라졌다.

<오츠 하나비에서 찍은 동영상>

흩날리는 벚꽃의 미학처럼 순간성과 유미주의의 결합이 일본 미의 한 특성이 아닐까라고 생각했는데, 하나비도 같은 범주에 들어가지 않을까?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

열 아홉, 스물. 어떤 경계의 양쪽에 발을 걸친채, 어느 한 쪽에 몸을 던지지 못했다. 혁명과 변화를 이야기하는 학생들에게, 너희의 삶이 끊임없이 요동치는 것이 과연 좋기만 하겠느냐고 반문하던 선생의 말뜻을 그 당시에 느끼고 이미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열정과 환희는 삶의 원동력이 아니라, 장강의 흐름 속 파문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는 것 말이다. 뜨거운 가슴하나로 운명을 개척하겠다는 사람들, 우습게 보였다. 하얗게 타버린다는 사람들, 안쓰러워 보였다.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은 토끼나 느끼는 거라고 조소했다. 그리고 생각한 대로 살지 않고 사는 대로 생각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스물아홉, 서른. 십년이 지나고 나서 보니, 하얗게 타버린다고 재가 되어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고, 뜨거운 가슴이 적당히 식어서는 적당히 알아서 산다. 생각한 대로 살다가,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되면서 번쩍했던 과거를 훈장처럼 달고 다닌다. 늦되서 그런 건지, 어긋짱난 구석이 있어서인지, 이제 내 삶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찾아야 할지와 생각하는 대로 사는 것을 고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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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 중

'언제 겨울이 왔을까? 계절은 사람이 늙는 것처럼 서서히 쇠퇴해갔다. 하루하루의 변화는 눈에 띄지 않았지만, 어느새 겨울은 가혹한 현실로 자라잡았다. 처음에는 저녁에 기온이 좀 내려가는가 싶더니, 며칠 계속 비가오고, 대서양에서 온 바람이 제멋대로 불고, 습도가 높아지고, 나뭇잎이 떨어지고, 결국 섬머타임으로 당겼던 시간을 다시 늦추게 되었다. 그래도 이따금씩 유예의 순간들이 있었다. 외투 없이 집을 나서다 구름 한 점 없이 밝게 빛나는 하늘을 볼 수 있는 아침이 그런 때였다. 그러나 이런 아침은 이미 죽음을 선고받은 환자가 보여주는 거짓 회복 징후와 같았다.


12월이 되자 새로운 계절은 확고하게 뿌리를 내렸다. 거의 매일 불길한 느낌을 주는 강철빛 회색 하늘이 도시를 덮었다. 만테냐나 베로네제의 그림에 나오는 하늘 같았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의 배경이 될 만한 하늘이었다. 아니면 침대에서 종일 뭉그적대는 날의 배경이 되거나. 동네 공원은 황량하게 진창으로 뒤덮이고, 밤이면 빗물이 얼룩지는 가로등 불에 그 모습이 환하게 드러났다. 비가 억수로 퍼붓던 어느 날 저녁 공원 옆을 지나다가 지난 여름 더위가 한창일 때 땅에 드러누워 신발을 벗고 맨발로 풀잎을 쓰다듬던 기억이 났다. 그렇게 땅과 직접 접촉하자 왠지 마음도 자유롭고 느긋해지는 것 같았다. 여름은 실내와 실외 사이의 일반적인 장벽을 부수어, 나는 세상 속에서도 내 방에 있는 것 같은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공원은 다시 낯설어졌다. 쉴 새 없이 내리는 비로 풀밭은 금단의 영역이 되었다. 도시의 가로등에 오렌짓 빛으로 물드는 낮은 하늘 아래로 비에 젖은 검붉은 벽돌 건물들과 마주치자, 잠복해 있던 슬픔이, 행복을 얻거나 이해를 받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는 회의가 물 만난 물고기처럼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

이 팸플릿을 만든 사람들은 어두운 직관을 통해, 야자나무, 맑은 하늘, 하얀 해변을 보여주는 노출 과다의 사진들, 지성을 모욕하고 자유의지를 무너뜨리는 힘을 지닌 이런 사진들에 사람들이 쉽게 현혹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삶의 다른 영역에서라면 회의와 신중을 자랑할만 한 사람들도 이런 요소들과 마주치면 원시적인 순수와 낙관의 상태로 돌아가고 말았다. 실제로 사람들은 이런 팸플릿을 보고도 강한 갈망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사람의 계획이 [그리고 심지어 인생 전체도] 아주 단순하고 어설픈 행복의 이미지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 감동적이면서도 진부한 예였다. 또 가계에 파탄을 일으킬 정도로 돈이 많이 드는 긴 여행이 열대의 바람에 살짝 기울어진 야자나무 사진 한 장으로 시작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이기도 했다.

나는 바베이도스 섬으로 떠나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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