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그라츠,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여행2008. 8. 8. 14:04
그라츠(Graz)는 오스트리아에서는 빈(Wien)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도시이다(2008년 현재 거주자 약 29만명). 그렇지만, 제국의 수도였던 빈과 모차르트로 유명한 짤츠부르크와 달리, 이름이 크게 알려진 적이 없는 조용한 2등이었다.
그럼에도 어느 유럽 도시 사람들처럼, 무엇 하나 사소한 것이라도 내세우고 싶어하는 그라츠 시 소속의 관광 가이드는 2003년 유럽 문화 수도가 되면서 처음으로 빈을 제꼈다며 뿌듯해하더니, 심지어 슐로스버그 광장 지하의 주차장은 백화점에서 얼마 이상 사면 무료 주차라느니 등의 자랑 아닌 자랑까지 늘어놓았다.
그러면서 오스만 투르크를 막아내는 데 돈을 많이 쓰느라 발전에 제약이 있었다는 말을 강조했다. 이말도 아주 틀리지는 않을 것이, 그라츠는 오스트리아 남부 쉬티리아(Styria)의 주도인데, 쉬티리아 주의 독일어 이름은 슈타이어마르크(Steirmark)이고, 옛날 독일어에서 마르크(Mark)는 보통 경계지역을 의미한다. 역사적으로도 1481년 마티아스 코르비누스(Matthias Corvinus)가 이끄는 헝가리 제국군, 1529년과 1532년의 오스만 투르크 침공을 막아냈다.
시내를 관통하는 무르강(Mur)변의 언덕위에 서 있는 슐로스버그(Schloßberg)는 문자 그대로 산(Schloß) 성(Berg)으로 1809년 나폴레옹 침공때가 되어서야 항복을 했을 뿐 16-7세기에 빈번했던 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쟁 중 이 지역에서 유일하게 함락되지 않은 요새였다. 내가 갔던 여름에는 옛날 요새 자리에서 재즈 페스티벌이 한창이었다. 이곳까지 오르기 위해서는 계단을 오르거나, 산안에 만든 엘리베이터를 타거나, 아니면 뒷 길로 다니는 전차나 그 길을 따라 걸어 올라가는 방법 등이 있다.
여느 도시처럼 시내 중심부에 시청(Rathaus)이 있다. 웅장한 규모는 아니지만, 다른 유럽 건물처럼 내부는 외관보다 커보였다. 시청을 구경시켜준 시 관계자는 시청 발코니는 축구스타나 올라가지 아무에게나 개방하는 것이 아니라며 어서 가서 사진찍으라고 너스레를 떨었는데, 정작 내려온지 10분도 안되어 다른 팀이 올라가있었다. 시민회관(Landhaus)은 이탈리아의 건축가 도메니코 델라리오(Domenico dell'Allio)가 1557년부터 1565년까지 지은 롬바르디아 양식의 건물로서, 오스트리아에 남아있는 중요한 르네상스 건축물의 하나이다. 시민회관은 정원으로 시청과 연결되어 있으며 이곳으로, 1551년 이후 잘 보존된, 약 3만점 이상의 병기류를 소장한 현존 최고의 바로크 시대 무기고에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그라츠는 어떤 누구도 알 수 있는 인상적인 사건의 주요 장소가 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빈이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사이 변방에서 묵묵히 적의 침입을 막아야만 했던 조연의 서글픔이랄까? 그렇지만 예나 지금이나 대학도시로서의 명성은 대단해서, 6개가 넘는 대학에 4만명 이상의 학생이 지금도 이 도시안에 있다. 총 인구의 거의 25%니 상당한 비율이다. 그래서 그라츠시 홈페이지에서 상주거주 인구와 총 인구를 구분하여 표시하지 않나 싶다.
교육도시로서의 명성에 걸맞게 볼츠만 상수의 볼츠만(Ludwig Boltzmann)을 비롯하여, 특히 의학, 생화학 분야에서 상당수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였고, 유명 지휘자인 칼 뵘(Karl Böhm)이 이 곳 출신이었으며, 원전연주의 붐을 일으킨 지휘자 니콜라스 아르농쿠르(Nicolaus Harnoncourt)가 이 곳에서 자랐다. 2003년 유럽 문화 수도로 선정된 배경에는 이 곳 출신 문화인들의 명성도 한 몫 했을 것이다.
그라츠 대학 친구의 말로는 2003년의 행사는 시 재정에는 재앙이었다고 말했지만, 그래도 두 개의 걸출한 건물을 남겼다. 하나는 무르강위에 인공으로 만든 섬(Murinsel)이고, 다른 하나는 현대미술박물관(Kunsthaus)이다.
슐로스버그에서는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같이 올라간 친구들 중 현재 카페로 사용되는 인공섬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는 친구는, 섬이 강바닥에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와이어로 지탱되고 있어, 물살이 센 여름에는 흔들림이 심해 사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나중에 사진으로 본 야경은 괜찮았지만, 불 꺼지고 사람이 없는 금속 구조물은 을씨년스러웠다. 다른 친구들과는 현대미술관이 무엇을 닮았는가에 대해서, 문어의 다리 같지 않냐부터 외계인의 우주선이 저런 모습일 것이라는 이야기로 시시덕거렸다.
어쨋든 그라츠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도시일지 몰라도, 관광객을 주목을 끌거나 세간의 이목이 집중될만한 도시는 아니었다. 동유럽과 맞대어 있는 역사적 경험을 토대로 이민자에 대해 관용적인 정책을 펴기로 한 것이 앞으로 어떤 의미를 남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서유럽의 역사에 밝지 않더라도 이 도시는 누구나 알 수 있는 대스타를 한 명 갖고 있다. 터미네이터 출신의 캘리포니아 주지사 아놀드 슈왈제네거(Arnold Schwarzenegger). 그의 독일어 액센트가 강한 영어는 고향 그라츠에서 비롯되었다. 세계적인 대스타에 대한 자부심이랄까, 귀여우라고 그린 것이 틀림없지만 내 눈에는 우스꽝스럽게만 보이는, 선글라스 쓴 아놀드 캐리커쳐를 표지로 한 자서전이 시내 서점마다 눈에 잘 띄는 곳에 진열되어 있었다.
합스부르크왕가의 행정력이 낳은 유산인지 몰라도 오스트리아 사람들의 감투 사랑은 남달라 보였는데, 시청 및 시내 투어를 시작할 때까지, 시장 비서, 시 교육위원회 관계자, 시 의회 및 주 의회 교육분과위원회 위원장이 돌아가면서 한 마디씩 했고, 또 각자가 자신의 직함을 나열하는 것 만으로도 상당한 시간을 잡아먹었다. 그래서, 그라츠인들의 아놀드 사랑은 그가 주지사라는 타이틀을 가졌을 때 최고조에 다랬는지, 명예의 반지도 수여하고, 축구경기장에 그의 이름을 붙여 슈바르츠제네거 스타디움이라고 했다.
이게 끝이 아니라, 아놀드 주지사가 2005년 국제적인 여론에도 불구하고 사형을 강행하면서 부터 재미있는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강력하게 사형제 폐지를 지지하는 오스트리아 사람들답게(오스트리아는 사형제를 법적으로 폐지한 국가), 그라츠 사람들도 아놀드가 자신들의 자랑스런 아들이 잘못된 일을 했다고 생각했고, 그의 이름을 스타디움에서 빼야 하지 않냐를 시 의회 투표 안건으로 올렸다.
이 소식을 들은 아놀드는 더 이상 자신을 아들로 생각하지 않으므로 반지도 반납하고, 스타디움 뿐만 아니라 그라츠 시에서 자신을 활용하는 모든 선전에서도 이름을 빼줄 것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그라츠 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가 찬반으로 나뉘었다. 당연히 여기에는 정치적 입장이 개입되었다. 사형제를 반대하는 기민당, 녹색장, 공산당, 사민당 등과 경제적 이점을 위해서는 유지해도 되지 않느냐는 보수당으로 갈렸다.(관련기사: BBC, 오마이뉴스) 이후 자세한 전개 과정은 확인할 수 없었지만, 같이 있었던 그라츠 대학의 친구는 투표를 통해 그 이름을 뺐다고 했다. 현재 스타디움의 이름은 UPC-ARENA이다.
지금 그닥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이 보이는 행동은 크게 두 가지다. 납작 업드리거나 끝까지 고집부리거나. 둘다 그나마 가지고 있는 것이라도 지키기 위한 행동인데, 도덕적으로 어느 것이 옳은지 그른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지금 우리 도시를 자랑스럽고 유명하게 하고 싶다. 이에 걸맞는 사람이 나타났지만, 우리 도시 사람들이 반대하는 행동을 이 사람이 했다. 이 사람의 이름으로 우리 도시를 계속 알려야 할까? 과연 그가 한 행동이 정말 나쁜 행동일까?
이러한 문제에 대한 입장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인간이 이러한 문제에 대해 발휘해온 해결책은 집단의 지혜를 빌리는 것이었다. 민주주의는 집단적 지혜의 현대적 표현일 것이다. 인간이 발전시켜온 것은 뇌의 크기도 섹스 능력도 있겠지만, 갈등을 해결하는 방식이었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힘을 가진 자는 이러한 갈등을 은폐시키고자 했지만, 그것이 좋은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은 역사가 보여주었다.
여행 중 만난 초등학교 선생님 한분은 놀라운 이야기를 해주었다. 서울의 한 지역에서 근무하는 데, 서울에서도 유명한 저소득층 지역이 그곳에서 공식적으로 결식아동이면서 급식 지원을 받는 학생이 약 10% 정도라고 했다. 문제는 이러저러한 제도적 장치로 인해 결식아동임에도 급식 지원을 받을 수 없는 학생의 숫자가 상당한 숫자여서 어떤 경우에는 50%까지 상회한다는 것이었다. 교사의 재량으로 이들에게도 지원이 돌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원어민 교사 선발 지시가 내려온 후, 재량으로 사용하던 급식 지원 예산을 원어민 교사 월급으로 지급해야 했으며, 자신은 아이들에게 앞으로는 점심값을 내라는 말을 해야만 했다는 것이다.
지금 당장의 식사와 앞으로의 식사(사실 이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중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 가의 문제는 중요한 가치 판단이다. 둘 중 어느 것이 옳으냐가 그르냐의 문제보다, 더 큰 중요한 문제는 왜 우리가 이러한 문제를 사회적으로 논의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자신을 살 수 있게 하는 무엇이 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의 질문에 대한 답은 누구나 갖고 있거나 찾으려고 한다. 모두 같은 답을 가질 필요는 없다. 문제는 자신의 답이 다른 사람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가이다. 우리 사회는 그러한 시스템이 있을까? 아니 때로 요즘에는 그런 생각 자체가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어느 유럽 도시 사람들처럼, 무엇 하나 사소한 것이라도 내세우고 싶어하는 그라츠 시 소속의 관광 가이드는 2003년 유럽 문화 수도가 되면서 처음으로 빈을 제꼈다며 뿌듯해하더니, 심지어 슐로스버그 광장 지하의 주차장은 백화점에서 얼마 이상 사면 무료 주차라느니 등의 자랑 아닌 자랑까지 늘어놓았다.
그러면서 오스만 투르크를 막아내는 데 돈을 많이 쓰느라 발전에 제약이 있었다는 말을 강조했다. 이말도 아주 틀리지는 않을 것이, 그라츠는 오스트리아 남부 쉬티리아(Styria)의 주도인데, 쉬티리아 주의 독일어 이름은 슈타이어마르크(Steirmark)이고, 옛날 독일어에서 마르크(Mark)는 보통 경계지역을 의미한다. 역사적으로도 1481년 마티아스 코르비누스(Matthias Corvinus)가 이끄는 헝가리 제국군, 1529년과 1532년의 오스만 투르크 침공을 막아냈다.
시내를 관통하는 무르강(Mur)변의 언덕위에 서 있는 슐로스버그(Schloßberg)는 문자 그대로 산(Schloß) 성(Berg)으로 1809년 나폴레옹 침공때가 되어서야 항복을 했을 뿐 16-7세기에 빈번했던 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쟁 중 이 지역에서 유일하게 함락되지 않은 요새였다. 내가 갔던 여름에는 옛날 요새 자리에서 재즈 페스티벌이 한창이었다. 이곳까지 오르기 위해서는 계단을 오르거나, 산안에 만든 엘리베이터를 타거나, 아니면 뒷 길로 다니는 전차나 그 길을 따라 걸어 올라가는 방법 등이 있다.
여느 도시처럼 시내 중심부에 시청(Rathaus)이 있다. 웅장한 규모는 아니지만, 다른 유럽 건물처럼 내부는 외관보다 커보였다. 시청을 구경시켜준 시 관계자는 시청 발코니는 축구스타나 올라가지 아무에게나 개방하는 것이 아니라며 어서 가서 사진찍으라고 너스레를 떨었는데, 정작 내려온지 10분도 안되어 다른 팀이 올라가있었다. 시민회관(Landhaus)은 이탈리아의 건축가 도메니코 델라리오(Domenico dell'Allio)가 1557년부터 1565년까지 지은 롬바르디아 양식의 건물로서, 오스트리아에 남아있는 중요한 르네상스 건축물의 하나이다. 시민회관은 정원으로 시청과 연결되어 있으며 이곳으로, 1551년 이후 잘 보존된, 약 3만점 이상의 병기류를 소장한 현존 최고의 바로크 시대 무기고에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그라츠는 어떤 누구도 알 수 있는 인상적인 사건의 주요 장소가 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빈이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사이 변방에서 묵묵히 적의 침입을 막아야만 했던 조연의 서글픔이랄까? 그렇지만 예나 지금이나 대학도시로서의 명성은 대단해서, 6개가 넘는 대학에 4만명 이상의 학생이 지금도 이 도시안에 있다. 총 인구의 거의 25%니 상당한 비율이다. 그래서 그라츠시 홈페이지에서 상주거주 인구와 총 인구를 구분하여 표시하지 않나 싶다.
교육도시로서의 명성에 걸맞게 볼츠만 상수의 볼츠만(Ludwig Boltzmann)을 비롯하여, 특히 의학, 생화학 분야에서 상당수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였고, 유명 지휘자인 칼 뵘(Karl Böhm)이 이 곳 출신이었으며, 원전연주의 붐을 일으킨 지휘자 니콜라스 아르농쿠르(Nicolaus Harnoncourt)가 이 곳에서 자랐다. 2003년 유럽 문화 수도로 선정된 배경에는 이 곳 출신 문화인들의 명성도 한 몫 했을 것이다.
그라츠 대학 친구의 말로는 2003년의 행사는 시 재정에는 재앙이었다고 말했지만, 그래도 두 개의 걸출한 건물을 남겼다. 하나는 무르강위에 인공으로 만든 섬(Murinsel)이고, 다른 하나는 현대미술박물관(Kunsthaus)이다.
슐로스버그에서는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같이 올라간 친구들 중 현재 카페로 사용되는 인공섬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는 친구는, 섬이 강바닥에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와이어로 지탱되고 있어, 물살이 센 여름에는 흔들림이 심해 사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나중에 사진으로 본 야경은 괜찮았지만, 불 꺼지고 사람이 없는 금속 구조물은 을씨년스러웠다. 다른 친구들과는 현대미술관이 무엇을 닮았는가에 대해서, 문어의 다리 같지 않냐부터 외계인의 우주선이 저런 모습일 것이라는 이야기로 시시덕거렸다.
어쨋든 그라츠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도시일지 몰라도, 관광객을 주목을 끌거나 세간의 이목이 집중될만한 도시는 아니었다. 동유럽과 맞대어 있는 역사적 경험을 토대로 이민자에 대해 관용적인 정책을 펴기로 한 것이 앞으로 어떤 의미를 남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서유럽의 역사에 밝지 않더라도 이 도시는 누구나 알 수 있는 대스타를 한 명 갖고 있다. 터미네이터 출신의 캘리포니아 주지사 아놀드 슈왈제네거(Arnold Schwarzenegger). 그의 독일어 액센트가 강한 영어는 고향 그라츠에서 비롯되었다. 세계적인 대스타에 대한 자부심이랄까, 귀여우라고 그린 것이 틀림없지만 내 눈에는 우스꽝스럽게만 보이는, 선글라스 쓴 아놀드 캐리커쳐를 표지로 한 자서전이 시내 서점마다 눈에 잘 띄는 곳에 진열되어 있었다.
합스부르크왕가의 행정력이 낳은 유산인지 몰라도 오스트리아 사람들의 감투 사랑은 남달라 보였는데, 시청 및 시내 투어를 시작할 때까지, 시장 비서, 시 교육위원회 관계자, 시 의회 및 주 의회 교육분과위원회 위원장이 돌아가면서 한 마디씩 했고, 또 각자가 자신의 직함을 나열하는 것 만으로도 상당한 시간을 잡아먹었다. 그래서, 그라츠인들의 아놀드 사랑은 그가 주지사라는 타이틀을 가졌을 때 최고조에 다랬는지, 명예의 반지도 수여하고, 축구경기장에 그의 이름을 붙여 슈바르츠제네거 스타디움이라고 했다.
이게 끝이 아니라, 아놀드 주지사가 2005년 국제적인 여론에도 불구하고 사형을 강행하면서 부터 재미있는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강력하게 사형제 폐지를 지지하는 오스트리아 사람들답게(오스트리아는 사형제를 법적으로 폐지한 국가), 그라츠 사람들도 아놀드가 자신들의 자랑스런 아들이 잘못된 일을 했다고 생각했고, 그의 이름을 스타디움에서 빼야 하지 않냐를 시 의회 투표 안건으로 올렸다.
이 소식을 들은 아놀드는 더 이상 자신을 아들로 생각하지 않으므로 반지도 반납하고, 스타디움 뿐만 아니라 그라츠 시에서 자신을 활용하는 모든 선전에서도 이름을 빼줄 것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그라츠 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가 찬반으로 나뉘었다. 당연히 여기에는 정치적 입장이 개입되었다. 사형제를 반대하는 기민당, 녹색장, 공산당, 사민당 등과 경제적 이점을 위해서는 유지해도 되지 않느냐는 보수당으로 갈렸다.(관련기사: BBC, 오마이뉴스) 이후 자세한 전개 과정은 확인할 수 없었지만, 같이 있었던 그라츠 대학의 친구는 투표를 통해 그 이름을 뺐다고 했다. 현재 스타디움의 이름은 UPC-ARENA이다.
지금 그닥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이 보이는 행동은 크게 두 가지다. 납작 업드리거나 끝까지 고집부리거나. 둘다 그나마 가지고 있는 것이라도 지키기 위한 행동인데, 도덕적으로 어느 것이 옳은지 그른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지금 우리 도시를 자랑스럽고 유명하게 하고 싶다. 이에 걸맞는 사람이 나타났지만, 우리 도시 사람들이 반대하는 행동을 이 사람이 했다. 이 사람의 이름으로 우리 도시를 계속 알려야 할까? 과연 그가 한 행동이 정말 나쁜 행동일까?
이러한 문제에 대한 입장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인간이 이러한 문제에 대해 발휘해온 해결책은 집단의 지혜를 빌리는 것이었다. 민주주의는 집단적 지혜의 현대적 표현일 것이다. 인간이 발전시켜온 것은 뇌의 크기도 섹스 능력도 있겠지만, 갈등을 해결하는 방식이었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힘을 가진 자는 이러한 갈등을 은폐시키고자 했지만, 그것이 좋은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은 역사가 보여주었다.
여행 중 만난 초등학교 선생님 한분은 놀라운 이야기를 해주었다. 서울의 한 지역에서 근무하는 데, 서울에서도 유명한 저소득층 지역이 그곳에서 공식적으로 결식아동이면서 급식 지원을 받는 학생이 약 10% 정도라고 했다. 문제는 이러저러한 제도적 장치로 인해 결식아동임에도 급식 지원을 받을 수 없는 학생의 숫자가 상당한 숫자여서 어떤 경우에는 50%까지 상회한다는 것이었다. 교사의 재량으로 이들에게도 지원이 돌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원어민 교사 선발 지시가 내려온 후, 재량으로 사용하던 급식 지원 예산을 원어민 교사 월급으로 지급해야 했으며, 자신은 아이들에게 앞으로는 점심값을 내라는 말을 해야만 했다는 것이다.
지금 당장의 식사와 앞으로의 식사(사실 이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중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 가의 문제는 중요한 가치 판단이다. 둘 중 어느 것이 옳으냐가 그르냐의 문제보다, 더 큰 중요한 문제는 왜 우리가 이러한 문제를 사회적으로 논의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자신을 살 수 있게 하는 무엇이 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의 질문에 대한 답은 누구나 갖고 있거나 찾으려고 한다. 모두 같은 답을 가질 필요는 없다. 문제는 자신의 답이 다른 사람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가이다. 우리 사회는 그러한 시스템이 있을까? 아니 때로 요즘에는 그런 생각 자체가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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