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류 관광엽서사진관

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 중

'언제 겨울이 왔을까? 계절은 사람이 늙는 것처럼 서서히 쇠퇴해갔다. 하루하루의 변화는 눈에 띄지 않았지만, 어느새 겨울은 가혹한 현실로 자라잡았다. 처음에는 저녁에 기온이 좀 내려가는가 싶더니, 며칠 계속 비가오고, 대서양에서 온 바람이 제멋대로 불고, 습도가 높아지고, 나뭇잎이 떨어지고, 결국 섬머타임으로 당겼던 시간을 다시 늦추게 되었다. 그래도 이따금씩 유예의 순간들이 있었다. 외투 없이 집을 나서다 구름 한 점 없이 밝게 빛나는 하늘을 볼 수 있는 아침이 그런 때였다. 그러나 이런 아침은 이미 죽음을 선고받은 환자가 보여주는 거짓 회복 징후와 같았다.


12월이 되자 새로운 계절은 확고하게 뿌리를 내렸다. 거의 매일 불길한 느낌을 주는 강철빛 회색 하늘이 도시를 덮었다. 만테냐나 베로네제의 그림에 나오는 하늘 같았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의 배경이 될 만한 하늘이었다. 아니면 침대에서 종일 뭉그적대는 날의 배경이 되거나. 동네 공원은 황량하게 진창으로 뒤덮이고, 밤이면 빗물이 얼룩지는 가로등 불에 그 모습이 환하게 드러났다. 비가 억수로 퍼붓던 어느 날 저녁 공원 옆을 지나다가 지난 여름 더위가 한창일 때 땅에 드러누워 신발을 벗고 맨발로 풀잎을 쓰다듬던 기억이 났다. 그렇게 땅과 직접 접촉하자 왠지 마음도 자유롭고 느긋해지는 것 같았다. 여름은 실내와 실외 사이의 일반적인 장벽을 부수어, 나는 세상 속에서도 내 방에 있는 것 같은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공원은 다시 낯설어졌다. 쉴 새 없이 내리는 비로 풀밭은 금단의 영역이 되었다. 도시의 가로등에 오렌짓 빛으로 물드는 낮은 하늘 아래로 비에 젖은 검붉은 벽돌 건물들과 마주치자, 잠복해 있던 슬픔이, 행복을 얻거나 이해를 받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는 회의가 물 만난 물고기처럼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

이 팸플릿을 만든 사람들은 어두운 직관을 통해, 야자나무, 맑은 하늘, 하얀 해변을 보여주는 노출 과다의 사진들, 지성을 모욕하고 자유의지를 무너뜨리는 힘을 지닌 이런 사진들에 사람들이 쉽게 현혹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삶의 다른 영역에서라면 회의와 신중을 자랑할만 한 사람들도 이런 요소들과 마주치면 원시적인 순수와 낙관의 상태로 돌아가고 말았다. 실제로 사람들은 이런 팸플릿을 보고도 강한 갈망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사람의 계획이 [그리고 심지어 인생 전체도] 아주 단순하고 어설픈 행복의 이미지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 감동적이면서도 진부한 예였다. 또 가계에 파탄을 일으킬 정도로 돈이 많이 드는 긴 여행이 열대의 바람에 살짝 기울어진 야자나무 사진 한 장으로 시작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이기도 했다.

나는 바베이도스 섬으로 떠나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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